“버려진 아이들이 아니라 발견된 아이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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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들이 아니라 발견된 아이들이죠”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5.12.10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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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의사’ 50년의 작은 기적들
▲ 올해 82세 조병국 명예원장은 지금도 아이들을 위해 청진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6만명 아이들의 주치의였던 젊은 시절 그 때처럼….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명예원장

▲ 책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이 책은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서교교회 은퇴장로)의 50년 의료일기를 기록한 책이다. 고 박완서 소설가는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소감을 남겼다. ‘수기를 읽어 나가면서 나는 자주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이 짠해지곤 했다. 그건 감동이었다. 이야기 한 꼭지 한 꼭지마다 기적의 기록이고 해피엔딩이다.’

이 책 표지를 넘기면 조 원장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나온다. ‘서울시립아동병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며 50년 동안 버려진 아이들, 입양아들과 함께 했다. 1993년 정년을 맞아 홀트부속의원을 퇴임했으나,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전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계속 진료를 해오다 2008년 10월 건강상의 이유로 완전히 퇴임했다.’

“네가 하나님이냐?”
이 책을 썼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여전히 홀트 일산복지타운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정년 퇴임 때에도, ‘업무강도가 너무 세다’는 이유로 맡아줄 사람이 없어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 15년을 더 일했다. 2008년 완전 퇴임 후, 이젠 외부 병원을 이용하는 것으로 시스템이 바뀌었지만, 한밤중이나 그 밖의 긴급한 상황에서 급히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또 다시 돌아왔다. 오히려 이젠 홀트 안으로 들어왔다. 뒷산 아래 자락의 작은 방에 기거하며 ‘스페어 타이어’가 됐다. 때론 의사 선생님으로, 간호사로, 때론 버려진 아이들에게 할머니처럼, 때론 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돕는 상담자로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산다. 

“사실 그전에도 여러번 그만 두려고 했어요. 그때는 병원 시설도, 약도 지금처럼 좋지 못했죠. 아이들도 건강이 좋지 못했고요. 어느 월요일 아침에는 사망진단서를 13장이나 쓴 적이 있어요. 물론 여건이 좋지 않아서 그랬지만, 그때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자책감에 괴로웠다. 그만 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낙심해있던 그에게 잭 타이스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하나님이냐? 아픈 사람 옆에서 도와주는 게 의사지, 다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의사는 모든 환자를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교만이 그때 깨졌다. 

▲ 젊은 시절 어린 아이를 진찰하고 있는 조병국 원장.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쉬운 그런 때면, 신기한 일들이 잇달았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오래 전 입양 간 아이에게서 좋은 소식이 온다거나, 정말 죽을 줄 예상하고 수술대에 올라갔던 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곤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후원과 봉사가 날아왔다. 

“의사는 늘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살려낼 수가 없죠. 그래서 냉철하고 이성적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의사들은 기적을 믿습니다. 의학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깨어날 수 없는 사람이 깨어나고,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거든요.”

기적과 감사의 이야기들
시립아동병원 시절에 만난 영희라는 버려진 아이, 예쁜 아이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위장장애와 피부괴사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모든 간호사들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을까,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흉터 투성이어야할 피부도 말끔해졌다. 지금도 진주 같던 그 아이의 눈이 생각난다.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던 현군이는 영혼을 울리는 맑은 목소리를 가졌다. 세살배기로 홀트에 왔을 때에 아이는 온몸에 짐승의 발톱으로 할퀸 자국까지 있었다. 정신지체, 발달장애, 정서장애가 있었던 현군이는, 홀트 장애인 합창단 ‘영혼의 소리’의 단원이 된 이후 달라졌다. 그 아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

▲ 미국으로 입양 갔던 ‘영수’ 씨(맨오른쪽)의 가정.

뇌성마비였던 영수는 미국으로 입양 갔다가 어른이 돼서 한국에 왔다. 자기와 같은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재활의학을 공부했다. 결혼 후 아이가 안 생기자 “아내가 불임 판정을 받은 것도 내가 받은 만큼 베풀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아이를 입양했다. 장애아였다.

“3년 쯤 후였을까요. 영수에게 전화가 왔어요. ‘선생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아내가 임신했어요’라고요. ‘이 기적은 입양한 첫 아이 덕분이라고, 그 아이가 우리에게 기적을 가져왔다’고 말했어요. 저도 동감이었어요.”

실제로 영수 부부처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처지라 입양했다가 기적적으로 임신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입양한 첫 아이가 부모에게 둘째 아이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하늘은 역시 착한 사람을 버리지 않음을 본다. 영수는 그 딸 이름을 ‘말리 병국’이라고 지었다. 

자기도 산소통을 맨 근무력증 장애인이면서 역시 같은 근무력증을 앓고 있는 장애아를 “내 경험이 있으니 잘 도와줄 수 있다”고 입양해 가는 외국인 양부모도 있다. 50여 년 넘게 별별  아픈 사연과 모습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착한 ‘천사’들을 통해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다.

더 어려운 자들을 기억하며
평생 쪽진 머리로 살아온 조 원장은 자기를 꾸미고 살거나 무슨 오락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시절을 보냈다. 학교 다닐 적만 해도 예고편 나오면 안 본 영화가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청진기를 든 이후에는, 집, 병원, 교회, 이게 전부였다. 시립아동병원 시절에는 더 많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외국까지 원조를 받으러 다니다가 ‘국제거지’라는 별명을 얻고 모처로부터 가만히 있으라는 압박을 받기도 했다. 

홀트로 옮기면서 월급은 더 줄었지만 맘 편히 더 많은 아이들을 진료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작고한 남편도 연세대 의대 동창으로 이비인후과 의사였으니, 크게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때로는 병원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월급 타면 계란 100개씩을 사서 병원에 갖다 주기도 했다.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 그의 DNA는 조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듯하다. 20세 때 평양에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 산정현교회를 다녔던 외할아버지는 종종 전도여행을 다니셨는데,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우기도 했다. 친할아버지 역시 충청도에 본처 목사로 파송돼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어린 시절에 두 동생을 병으로 잃은 상처 때문에 의대에 입학하면서 그 이유를 “유아사망률을 낮추고 싶어서”라고 거창하게 대답했다는데, 결국 그 뜻을 이루며 살아왔지만 그의 세 자녀는 어쩌면 섭섭했을지 모른다. 병원 아이들 챙기느라 신경을 덜 썼을 수밖에 없었다. 

공휴일이면 자녀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아이들 급식을 돕게 했다. ‘너희는 엄마, 아빠를 밤에라도 볼 수 있지만 이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너희들이 도와주면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을 수 있어.’ 그 세 자녀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하다. 

평생 버려진 아이들과 살아온 조 원장. 그러나 아이 입양 서류에 ‘버려졌음’이라고 쓰지 않고 ‘발견됐음’이라고 쓴다. 몇 글자 차이지만 전혀 다르다. 절망과 원망, 증오가 시작될 수 있는 ‘버려짐’보다는, 희망과 감사와 기적이 시작될 수 있는 ‘발견됨’이 운명을 바꾼다. 82세 할머니 의사, 그는 아직도 청진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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