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구령은 복음의 핵심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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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구령은 복음의 핵심이야요"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4.10.16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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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역 선교사' 고 방지일 목사, 103년의 삶과 신앙

방지일 원로목사의 별세 소식은 103세의 고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고 방지일 원로목사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되는 것처럼 방 원로목사는 한국교회의 버팀목과 같았기에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특히 방 원로목사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인이 표현을 빌자면 누구 못지않게 '속죄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목회자였기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 방 원로목사의 한 세기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의 가문에서 성장한 방 원로목사는 청년기 평양 숭실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는 동안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4년간 전도사로도 사역하기도 했다. 방 원로목사는 당시 길선주 목사의 신앙과 경건한 예배에 모범을 평생을 잊지 않았다.
1911년 평안북도 선천 출생인 방지일 원로목사는 그 시대로는 드물게 조부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던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도 훗날 방 원로목사가 파송됐던 중국 산둥성에서 선교사를 사역했던 방효원 목사다.

1937년 드디어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던 방 원로목사는 돌연 진로를 바꿨다. 그해 교단 최초의 파송 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임명된 것. 방 원로목사는 파송에 순종했고, 무려 21년간이나 중국 현지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복음을 전했다.

▲ 1937년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될 당시, 출국에 앞서 가족과 선교위원들과 기념촬영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교인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고통도 있었다. 이미 1945년부터 조선 땅과는 연락이 두절됐고 선교비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한국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떠난 동료 선교사의 가족까지 맡아야했다. 미국을 거쳐 온 연락을 통해서야 1950년 동생이 미군에게 살해됐고, 이듬해 아버지의 사망 소식도 석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다.

방 원로목사는 당시 중국 안에서도 외국인인 줄 모를 정도로 현지인처럼 생활하며 교회를 이끌어갔다. 누군가 순교적 각오로 사역했다고 할 때 방 원로목사는 "내 생명이 살아있다고 생각 될 때 순교라고 말할 여유도 있다. 다 편안할 때 하는 말이다"고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치열한 현장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결국 선교사라는 사실이 발각됐고 중국 정부는 그를 북한으로 추방하려 했다. 하지만 서방세계에 중국에 유일한 선교사가 남아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제적 여론이 조성돼 그는 홍콩을 거쳐 1957년 그리운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당시 중국 교인들은 무사히 그가 돌아갈 수 있도록 매일 철야로 기도해줬다. 울면서 청도역까지 배웅을 나왔던 교인들. 본인 때문에 그들이 후에 받았을 어려움을 방 원로목사는 살아생전 늘 가슴 아파했다. 중국이 개방된 후 당시 교인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는 방 원로목사는 준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찾아가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혹시 교인들이 또 고통을 받게 될까봐….

귀국 일 년 후 1958년, 방 원로목사는 영등포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목회자가 없어 영등포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전했던 방 원로목사를 교회가 청빙한 것이다. 처음에는 본인은 선교사라 위임할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연이은 요청해 선교사를 사임한 후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방 원로목사는 예장 통합 전도부장과 두 차례 영등포노회장, 교단 유지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고, 1971년에는 제56대 총회장에 선출돼 교단 100주년 계획을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1979년 원로목사로 추대돼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끝은 그 때가 아니었다. 사망하기 며칠 전에도 한 선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던 그다. 은퇴 후 최근까지 국내 이곳저곳은 물론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노구를 이끌고 방문해 말씀을 전했다. 지난했던 그의 삶의 여정을 생각하면 쉼은 사치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더 복음을 전하고 싶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싶었던 영원한 목회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국교회 위기라는 진단 앞에 방 원로목사가 100세를 맞아 했던 인터뷰에서 내놓은 답변을 잊기 어렵다.
"예수를 못 믿게 하는 때도 아닌데 무에가 위기요. 우리가 뭘 못해서 핍박을 받나요? 다만 아이를 안 나아서 교인이 줄고 교단별로 수장이 되겠다고 싸우는 것이 부끄럽지, 다른 것은 없어요.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님을 전해야 해요. 속죄 구령은 복음의 핵심이야요"

그래서 방지일 원로목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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