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복음화’의 비밀을 간직한 섬 ‘증도’를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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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복음화’의 비밀을 간직한 섬 ‘증도’를 밟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3.12.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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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더 테레사 문준경 전도사가 맺은 찬란한 보물섬 이야기

크고 작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전남 신안. 남도의 많은 섬들 중 증도는 '천국의 섬'이라 불리운다. 풍요로운 갯벌과 보석처럼 빛나는 천일염, 그리고 환상적인 일몰. 그러나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보다 섬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증도가 간직한 놀라운 복음의 비밀 때문이다.

▲증도의 환상적인 일몰 광경. 증도의 일몰은 전국적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2013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남도의 모습은 어떠할까. 한차례의 폭설이 지나가고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12월의 끝자락에 ‘섬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남도 신안의 작은 섬을 찾았다. 복음화율 3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는 전남 신안군. 그 중에서도 증도는 전체 주민 2200여명 중 90% 이상이 예수를 믿고 있는 복음화율 1위의 지역이다. 그저 평범한 하나의 섬에 불과한 이곳에 무엇이 이토록 수많은 복음의 결실을 맺게 했을까. 증도에 이처럼 찬란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배경에는 50여년 전, 섬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던 문준경 전도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해에 아홉 켤레의 고무신이 닳아 없어지도록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질퍽한 개펄과 노두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을 문준경 전도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도리. 해안선을 따라 구부정한 시골 길을 지나다보면 몇 개의 작은 마을과 다리를 건너 드넓은 개펄이 펼쳐진 작은 섬 증도에 당도한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배가 없으면 오갈 수 없던 이곳에는 최근 들어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세워졌다. 왕래가 더욱 편해진 까닭일까. 매서운 칼바람이 이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고요한 섬을 순례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계속 되고 있었다.

겨울의 향기가 가장 짙게 스며든 12월의 말. 드넓은 육지를 떠나 분주한 일상을 뒤로하고 증도로 향하는 나룻배들과 차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증도가 그저 외딴 섬이 아님을 알게 한다.

시원한 파도소리와 코끝을 자극하는 바다냄새. 섬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흩날리는 눈발 속에 펼쳐진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아름다움을 가진 증도의 자연은 한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 증도대교를 건너 섬 입구에 당도하자마자 개펄에 수많은 염전이 펼쳐져 있다.
특별한 보물섬 ‘증도’ 이야기

증동리에 들어서면 땅을 빼곡히 매운 수많은 염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증도의 드넓은 개펄을 거쳐 염전으로 흘러들어와 보석처럼 빛나는 소금으로 맺힌다. 증동리 앞에 펼쳐진 130만평의 광활한 게르마늄 개펄과 천일염은 가히 ‘보물섬’이라고 칭할만한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보다 더욱 증도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안에 내제된 깊은 신앙의 유산 때문이다.

자연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 섬은 미신과 토속신앙에 젖어 살기 쉽다. 섬이 복음화 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복음이 깊이 뿌리 내린 증도에는 어떠한 사찰도 점집도 찾을 수 없다. 마을 주민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으며 증도에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증도에서 처음 세워진 증동리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첫 번째로 개척한 교회로서 순교하기 전까지 사역했던 곳이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녹슨 교회의 종탑이 눈에 띈다. 매일 교회의 새벽종을 치며 중동리의 아침을 깨웠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증동리를 지나 대초리, 방축리, 장고리, 우전리…

마을 한리 한리를 지날 때마다 마을 중심에 우뚝 솟은 십자가는 주민들의 삶과 신앙이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 지난 5월에 개관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 순교기념관에 보관된 문준경 전도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성경과 돋보기.
▲ 순교기념관에 보관된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과 당시 주민들의 산파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는 태반단지.
유품이 없는 순교기념관

증동리의 중심부 언덕에는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건물과 높은 십자가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 앞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이라는 큰 푯말이 눈에 띈다.

“다른 순교자에 비해 부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올해 초에 건립된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의 행정팀장 박현우 목사의 말이다.

순교기념관에 상주해 기념관의 살림을 맡고 있는 박 목사는 “그 분은 풍성한 열매 빼고는 남긴 흔적이 별로 없다”며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의 삶과 생애에 대한 간증으로 가득한 기념관은 어떠한 전시관보다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문준경순교기념관은 지난 5월에 개관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유명한 순교자로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변변찮은 건물이 없던 가운데 지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연합해 순교사업기념회를 만들었고 이들의 후원과 교단 등의 지원을 통해 전체 대지 면적 2000평에 3층 높이의 기념관과 생활관을 건립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박 목사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이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은 한국 교회의 위기 속에 ‘다시 순교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다”며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는 침체된 한국 교회에 큰 영적인 파도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손양원, 주기철 목사와 같은 유명한 순교자의 업적과 신앙을 기리는 많은 활동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장로교 교단이 아닌 성결교단에서 그것도 여자 순교자로서 빛을 발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도 속에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신앙은 ‘바로 지금’ 가장 빛나고 있었다.

기념관은 문준경 전도사의 소박한 유품을 비롯해 그녀가 걸었던 복음의 발자취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스토리들로 구성됐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그녀의 삶처럼 실질적으로 문준경 전도사가 남겨둔 유품은 성경책과 돋보기, 찬송가가 전부였다. 그리고 당시 주민들의 산파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증거가 되는 유물인 태반단지와 증동리의 아침을 깨운 새벽종은 그녀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순교기념관을 돌아보며 이 섬, 저 섬을 돛단배와 노두길을 이용해 질퍽한 갯벌을 밟으며 뚜벅뚜벅 한결같은 걸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그녀가 문득 그리워졌다.

▲ 증도의 명물 중 하나인 짱뚱어다리. 생전 문준경 전도사가 건넜던 질퍽한 개펄 위에는 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세워졌다.
▲ 문준경 전도사가 기도했던 중동리에 위치한 기도바위에서 내려다본 섬. 섬 모양이 마치 한반도 모양같아 당시에 나라를 품고 기도했던 문준경 전도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섬마을의 여자 ‘사도바울’

증도는 문준경 전도사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든 섬이었다.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증도에 방문한 이들은 문준경 전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숙이며 조의를 표하는 이들도 많다고 하니 그녀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를 믿기 전까지 철저하게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문준경 전도사.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후 한국의 마더 테레사 수녀로, 섬마을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평생을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비록 그녀의 인생의 시작은 고난이었을지언정 삶의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했다.

17살, 그녀는 어린 나이에 시집왔지만 결혼 전부터 다른 살림을 차린 남편으로 인해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르고 시집와서 20여년을 살았던 증도를 떠나 친정 오빠가 살고 있는 목포에서 한 부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한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문준경 전도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안 일대의 섬들을 돌며 말씀을 전파한다. 각 섬을 잇는 다리가 없던 까닭에 노두길과 돛단배를 이용해 죽음을 무릅쓰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한 손에는 의약품과 각종 먹을거리가 담긴 보따리를 들고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진리, 증동리, 대초리 세 마을에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마을 중간에 수시로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기도처를 만들었다. 기도처는 우전리 기도소, 재원 기도소, 방축리 기도소 등으로 계속해서 늘어났는데, 후에 이 교회들이 전부 번듯한 교회로 성장했다.

문준경은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삶으로 이웃을 섬기며 온갖 핍박 속에서도 눈물 젖은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한번은 증동리에 전염병인 장티푸스가 돌아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녀는 시체를 나르고 환자들을 돌보며 치료해 많은 사람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당시 그녀는 끝까지 교인들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애쓰다가 증동리 갯벌에서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다.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그녀는 양딸 백정희와 성도들을 살려달라 부탁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묻지 마시고, 죄 많은 내 영혼을 받으소서.” 칠흙같이 어두운 증동리 앞 백사장, 문준경 전도사는 이러한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행복한 순교자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나이 59세였다.

▲ 문준경 전도사 추모비.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솔무등공원 끝자락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故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라고 적힌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문준경 전도사의 묘가 있는 자리다. 묘소 중앙에는 커다랗게 세워진 비석에 ‘도서 복음의 어머니 고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라는 글과 함께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이 적혀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비석의 오른편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일대기가 빼곡히 쓰여 있는 돌로 만든 성경책이 있다. 그 밑에는 공산당들이 문준경 전도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죽창으로 찌르는 모습이 조각돼 있어 그날의 처참했던 광경을 떠오르게 만든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자, 그 결실은 순교의 영성이다. 문준경 전도사는 삶을 통해 순교자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날마다 자가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믿음의 산 증인이었다.

문준경 전도사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뿌린 순교의 씨앗을 통해 증도가 섬 전체가 예수를 믿는 ‘천국의 섬’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뿌린 씨앗으로 인해 복음화율 제로에 가까웠던 그 섬이 이제 복음화율 90%를 자랑하는 국내 기독교의 성지(聖地)가 됐다. 또한 그녀가 세운 교회들을 통해 김준곤, 이만신, 이만성, 이봉성, 정태기 목사 등 오늘날 기독교를 대변하는 30여명의 유명 목회자들이 배출됐다. 한국 교회가 이토록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준경 전도사와 같은 순교자들의 피와 숭고한 믿음,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 한 해를 뒤로하며 한국 교회에 다시 순교신앙이 요청된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신앙이 필요하다. 기독교역사에서 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시작이듯 한국 교회가 복음 앞에 엎드려 죽어질 때 새로운 희망의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동리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처음 개척한 교회다.
▲ 증도에 있는 11개 교회 중의 하나인 대초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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