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북 군산시 신흥동에 아담한 한옥을 사들여 구세군 군산후생학원에 기증한 것이다.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후배들이 일자리를 얻어 건장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립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조박사가 마련한 ‘군산 우리의 집’의 집은 대지 88평에 건평 15평에 시가로 1억5천. 지금은 방 3개로 대 여섯명이 생활을 시작하지만 마당의 창고를 개조하면 20여 명의 식구가 살아가기에 거뜬한 공간이 마련된다. 현재 ‘우리의 집’은 군산대 입학생 등 후배 5명이 살 수 있도록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이러한 나눔의 삶 속에는 그의 보이지 않는 절약정신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수입이 괜찮다는 축에 끼는 의사이면서도 조박사는 아침이면 일반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러시아워에 차가 밀릴까봐 자가용을 놓고 오는 것이 아니다. 조박사는 자가용이 없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자가용은 사치라는 것이 그의 지론. 생활 속에서도 그의 근검정신은 그대로 뭍어 나온다. 우유팩 하나 비닐봉지 하나를 그냥 버리는 일이 없다. 후배의사들의 놓치기 쉬운 낭비도 언제나 그의 지적대상이다. 이번 ‘우리의 집’ 기증도 10여 년 조박사의 내핍생활의 산물인 셈이다. 어린시절 굶기를 밥먹듯이 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며 남을 도울만할 여력이 있을 때 도와야 한다는 그의 선한 마음은 지고지순하다. 조 박사는 중 2때인 62년 부모를 모두 잃고 군산시청 사회과의 소개로 동생과 함께 처음 후생학원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후생학원은 불우한 아동들을 수용해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사회복지 기관이었다. 그는 후생학원에서 2년동안 공부와는 담을 쌓아야 했다. 이발소 보조, 신문배달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가슴 한 켠의 허전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학업에 대한 미련때문이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조박사는 입학을 결정했고 자는 시간이외에는 공부에 전념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욱 분발했지만 무엇보다 공부가 하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단호했다. 중학교 야간반을 졸업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68년에는 연세대 의대에 당당히 입학했다. 당시 1백 여명이 넘는 원생 중 대학을 가는 경우는, 그것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그는 구세군측의 헌신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등록금은 유한양행 고 유일한박사가 보탰고, 구세군도 조 박사를 아낌없이 후원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김명선씨 등 조박사를 돕기 위한 도우미들의 손길은 계속됐고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연세·경희대 교수를 거쳐 포천중문의대 교수와 차병원 수련부장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조박사는 ‘우리의 집’을 넓혀 무의탁 노인과 보육원을 떠나는 청소년들이 함께 사는 가족 공동체를 이룰 계획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우리집’을 말이다. 인생 황혼기에는 사재를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어려운 고학생을 돕는 일로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는 조주연 박사. 인간을 아무 대가없이 사랑하셨던 예수님처럼 그가 말하는 보은의 삶 또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랑의 구주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들이 역경을 잘 이겨내고 사회의 건실한 일꾼으로 커나가는데 힘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여전히 소박한 그의 소망이 커다란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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