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교회에 묶어두는 강력한 부흥ㆍ전도 수단으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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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교회에 묶어두는 강력한 부흥ㆍ전도 수단으로 활용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2.03.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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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무너진 한국교회, 다시 세우자 ⑤ 기복신앙의 폐단 (중) 교회에 끼친 악영향

 

▲ 헌금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헌금을 복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심각한 폐해 중 하나가 바로 샤머니즘 색채를 지닌 ‘기복신앙’이다. 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는 기복신앙은 성경적인 복(福)의 개념을 완전히 세속화시켰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비롯해 예배와 기도, 헌금, 전도, 봉사 등의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과 이유도 ‘기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교회 안에 교묘하게 머물고 있는 기복신앙의 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한 기복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성경적 교회관을 변질시키고 있는 기복신앙을 진단해본다. <편집자 주>

‘믿음 = 만사형통’이라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성경 왜곡 심각
주일헌금ㆍ부흥회ㆍ기도회 등도 ‘부와 성공’ 위한 수단으로 전락

기복신앙은 극히 물질적인 ‘부와 성공’의 추구함으로 점철된다. 물론 부와 성공은 성경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긍정적이면서 선한 측면도 함께 갖고 있다. 하지만 부와 성공의 기준은 반드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바른 실천의 자리에서 판단하고 정해야 한다.

#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교회
박득훈 목사(새맘교회)는 “부와 성공은 인간의 타락 전과 후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있다”며 “목회자와 성도들이 부와 성공의 유혹에 넘어갈 때 교묘한 기복신앙이 탄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목사는 “부의 선한 면을 부각시키려면 우선적으로 부에 대한 청지기 사상을 확립해 개인윤리 및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정의로운 부를 창조해야 한다”며 “사회경제적 성공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을 닮아가는 것이 바른 ‘성공관’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와는 극히 다른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미 교회 운영을 비롯해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 속에 세속적인 물질관, 황금만능주의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이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는 “한국 교회 위기는 부요한 삶을 성공으로 생각하는 번영신학과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기복신앙에서 비롯됐다”며 “부와 성공은 세상적 인식이지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속히 깨달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실 지난 1999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는 ‘하나님과 국민 앞에 우리 자신을 고발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한목협에 소속된 목회자들은 외형적 교회성장에 치중한 점, 청빈의 삶을 살지 못한 점, 업적주의와 영웅주의에 빠진 점, 왜곡된 기복신앙을 강조한 점 등 7가지 죄를 고백했는데, 그때 회개한 죄 대부분 ‘기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지금 한국 교회는 여전히 ‘기복신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신앙적인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신앙의 기본이며 목표가 돼 버렸기 때문에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복과 성공, 건강을 가져다주는 ‘만사형통’의 보증수표를 얻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강단에 선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설교’가 기복신앙 조장
목회자가 교회 안으로 성도들을 불러 모으는 것, 자신만의 목회 영역 안으로 성도를 끌어들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는 바로 기복적 설교를 하는 것이다. 특히 많은 목회자들이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은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첫째,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 말씀을 주로 인용한다. 기복신앙이 강한 목회자일 경우 이 본문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네 몸의 자녀’, ‘네 토지의 소산’, ‘네 짐승의 새끼’, ‘네 광주리와 떡 반죽’,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의 핵심은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설교할 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강조하기보다 ‘복’ 자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15절 이후부터 보다 중요하게 언급되는 저주의 말씀은 설교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복을 받는다는 부분만 설교에 활용하는 등 성경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십일조와 관련된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씀을 해석할 때도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말라기의 십일조 교훈은 타락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말씀 다음에 주어진 부수적인 교훈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즉, 고통에 처한 사람을 학대하고, 물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등 불의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하라는 의미로 사용됐을 뿐, 복을 얻기 위해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한 본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요한3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 본문에 등장하는 영혼, 범사, 강건을 영적, 물질적, 육체적인 복으로 이해한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삼박자 축복’이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범사’를 물질적 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펼친다면 영적으로 풍성한 사람은 반드시 물질적 부를 소유해야 하고, 신체적으로도 반드시 건강해야 한다. 가난하거나 건강하지 못하다면 결국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신앙인이거나 불신의 결과로 봐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극히 편협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것으로 성경과 거리가 멀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조건을 내걸면서 기도할 것을 명령한 다음 그 결과로 얻고, 찾고 문을 열게 된다는 논리로 구성된 마태복음 7장 7절부터 8절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도 문제다. 대다수 목회자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요구사항들을 들어주신다고 인과율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신앙생활 중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할 경우 이 본문을 의지해 기도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 말씀들은 샤머니즘적 기복사상이 배후에 깔려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변질되거나 왜곡된 채로 성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 헌금은 복을 얻기 위한 수단
헌금에 나타난 기복신앙도 문제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지만 물질적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돼 버렸다. 중세교회처럼 면죄부를 파는 것은 아니지만 헌금을 많이 하면 물질적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인식이 교회 안에 퍼져 있다.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 어려운 헌금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및 주일헌금은 이제 거의 일반화된 헌금이다. 특별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감사헌금이 있으며, 부활절ㆍ맥추감사절ㆍ추수감사절ㆍ성탄절 등의 절기헌금이 있다. 이와 함께 선교헌금, 건축헌금, 구제헌금, 일천번제헌금 등 수십 가지의 헌금 봉투가 예배당 안에 구비돼 있다.

문제는 이러한 헌금에 언제나 ‘복’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마치 복채를 내듯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더 많은 복을 얻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십일조가 아닌 십이조, 십삼조 이상을 드리는 등 헌금을 더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 많이 받게 된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는 감사의 결과인 헌금을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다.

특히 ‘일천번제 헌금’에 대한 문제도 심각하다. 일천번제 헌금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굳이 찾는다면 열왕기상 3장 4절을 들 수 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일천 번제(燔祭)의 번은 태울 번으로써 숫자적 개념의 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본문의 말씀은 일천의 제물을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였다. 솔로몬은 소 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일천번제(一千燔祭)를 일천번제(一千番祭)로 해석하고 있다. 즉, ‘불’을 ‘셈’으로 바꿔 왜곡시켜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비나이다’로 변질된 기도회
이와 함께 기복신앙 경향이 농후한 부흥회와 각종 은사집회도 문제다. 부흥회는 외적인 교회성장이나 교회 건축을 위한 재정을 모금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신유집회와 같은 은사적 집회는 무속신앙의 형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목회자는 “신유집회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경우 ‘병 굿’을 진행하는 무당과 별반 다를 바 없다”며 “일부 성도들은 이러한 목회자를 마치 ‘신 내린 무당’을 대하듯 존경하거나 따르기도 한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기도회도 문제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기본이지만 기도회의 목적이 변질돼버린 것이다. 기도의 내용 또한 대부분 개인적이고 가정적이다.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회’의 경우 일정한 기간 동안 예배당 앞에 현수막을 내걸고 오직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한다. 심지어 시험 당일 시험시간에 맞춰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 릴레이 기도를 하는 등 하나님을 향해 정답이 있는 곳으로 손을 움직여달라고 요청한다. 마치 정화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거나,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에 가서 엿을 부쳐놓고 합격을 기원하는 무속신앙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기복신앙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 원인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거나 성경을 왜곡시키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교회의 외적성장과 함께 자신의 목회 안정을 위해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믿음 = 만사형통’이라는 비성경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은 성도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고, 또한 비그리스도인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강력한 전도와 부흥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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