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잃은 연합운동, 정권과 결탁하며 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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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잃은 연합운동, 정권과 결탁하며 오염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2.03.0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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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한국 교회 다시 세우자 (4)-갈라지는 ‘연합’ 이대로 좋은가(중)

‘사회적 계도’라는 연합운동의 기초적 목적마저 상실
견제해야 할 정치권력에 맛들이며, 교권의 늪에 빠져

한국 교회연합운동은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회통합공의회로 시작해 1918년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발전했으며, 해방 이후 이 전통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연합운동 기구가 바로 교회협(KNCC)인 것이다.

교회협 전신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규칙은 이렇다. △협동하여 복음을 전파함 △협동하여 사회도덕의 향상을 계도함 △협동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의 보급을 계도함. 1905년 처음 태동한 재한복음주의선교회통합공의회 역시 백만구령운동 주도와 일제에 의한 교육 탄압 대응, 선교부의 선교지 분할 협약 등이 주된 설립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 연합, 그리고 사회적 대응이라는 공통분모가 발견되는 부분이다.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로 창립된 교회협은 장로교와 감리교 및 각 선교부가 회원으로 가입했다. 1948년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구세군과 성결교, 기독신민회가 추가됐다. 1956년 기장에 이어 1960년 성공회가 가입했지만 1962년 성결교회는 탈퇴를 선언한다. 원인은 WCC였다. 용공논쟁이 한창이던 당시 교회 내 보수권은 용공부의 의혹을 받는 WCC와 교류를 선언한 교회협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이후 교회협은 자의와 상관없이 ‘진보’로 분류되면서 70년 넘는 역사를 이어왔다.

교회협이 한국 교회의 상징적인 기구로 꼽히는 것은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도시빈민 문제와 노동자들의 인권을 대변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는 통일운동에 앞장서며 단절된 남북관계에 물꼬를 열었던 사회적 기여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세계 교회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교회 청년운동과 사회선교의 발판을 마련했고, 한반도 문제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도 공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협과 이념적인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는 교회들은 새로운 기구를 조직했다. 1989년 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탄생했다. 한기총은 보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사회적 이슈를 던졌고, 교계 보수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한기총은 이와같은 보수권의 결집으로 창립 후 불과 10년 만에 교회협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며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한 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력을 맛보며 시작된 태생적 한계는 한기총의 역사성을 이어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2012년, 창립 23년째를 맞이한 한기총은 두 개로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다”는 사회적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으며 교회를 넘어 사회적 존경을 받는 단체였던 교회협 역시 한기총의 등장이후 보수권의 끈질긴 공격 앞에 위상이 저하되고, 시대적 변화와 시민사회의 성숙에 따른 역할 축소로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

# 연합의 몰락 유도한 ‘정교밀착’

한국 교회 선교초기 연합정신 중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대사회적 계도였다. 기독교적 신앙에서, 성경적 시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협의 지난 역사 속에서 잘 나타났다. 교회협은 1960년 4.19 이후 교회의 의견을 피력하고 3.15선거가 부정했음을 밝히며 같은 기독교 대통령을 향해 결단을 촉구했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성명서도 내놓게 됐다. 1988년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했으며, 1993년 농산물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즉, 사회적 문제에 대해 서슴없이 기독교계의 목소리를 드러낸 것이다.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는 “군사정권 시절, 교회협의 진보적 활동에 대해 보수적 인사들은 ‘침묵’과 ‘소극적 동조’를 해주었다”고 말했다. 이유는 당시 민주화와 인권의 문제가 분명한 도덕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된 후 보수교회는 돌변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한기총의 태동도 예장 내부 보수파들이 다른 교단 보수파와연합해 교회협의 견제할 목적으로 결성한 것이며, 이로 인해 90년대 이후 보수 헤게모니가 가시화되면서 반 에큐메니칼 단체가 한국 개신교의 대표성을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에큐메니칼권 역시 민주화 이후 정치적으로 밀접한 행보를 시작하면서 도덕적 명분을 잃게 됐다는 점. 정 교수는 “87년 대선 당시 에큐 인사들은 DJ와 YS의 정치노선을 따라 분열했으며 이로 인해 에큐 운동의 정통성과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교회협과 관계된 주요 성직자 지도력이 참여하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세우는데 있어서 도덕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독교 우파에서 즐기는 정교유착의 유혹을 에큐메니칼권에서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비판의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 교권의 정점 한기총 사태

명분을 잃는다는 것은 ‘운동성의 약화’를 초래한다. 연합운동단체가 명분을 잃고 운동성이 약화되면 이미 그 조직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보수권의 끈질긴 와해 시도와 정교유착, 내부 이권 다툼으로 대표성이 퇴색된 교회협을 놓고 회원 교단 안에서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운동성을 되살릴 ‘명분’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기총은 어떨까. 한기총은 단순히 지도부의 정교유착을 넘어선다. 한기총 자체가 ‘권력’으로 인식되면서 교계와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남겼다.

최초 한기총은 500교회 이상의 교단만을 회원으로 인정했고, 대표회장 역시 교단 합의에 의해 정해졌다. 이러한 전통이 깨진 것은 지난 2003년. 예장 통합 김기수 목사가 ‘경선’을 도입하면서 군소교단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얼핏 보면 모두에게 ‘동등한’ 연합의 원칙을 적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검증 없이 회원을 영입하는 한기총의 특성상 이같은 배려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한기총에서 금권선거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후부터. 매년 선거 때마다 뿌려지는 단위는 높아져 갔고, ‘10당 5락’(10억을 쓰면 붙고, 5억을 쓰면 떨어진다)이라는 웃지 못 할 농담들이 오갔다.

구포제일교회 이성구 목사는 “한기총은 마구잡이 교단영입과 각종 형태의 기관 단체 영입으로 세만 불린 채 금권선거로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성서한국 구교형 목사는 “연합기구가 이권과 관련될 때 부패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한기총의 경우 특정할만한 고유사업이 없다는 구조적 문제가 발견된다는 것. “연합기구란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한기총은 보수교단의 교단장과 원로들에게 마지막 남은 명예욕을 불태우는 자리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기총이 교단 기득권층의 관심을 받게 된 것 역시 정치적 유착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0년 간 보수권의 결집은 강화됐고, 이들은 정치권을 공격하기 위한 장외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권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한기총에 드나들었다. 마치 교회협이 유신과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 존재감이 커졌던 것처럼, 한기총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쾌감을 느끼는 교계 보수층의 지지가 높아졌고, 한기총 대표회장이라면 청와대도 들락거릴 수 있는 권력자로 인식됐다. 이와 같은 왜곡이 비판 없이 정착되면서 한기총은 헤어 날 수 없는 늪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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