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진리를 외쳤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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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진리를 외쳤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 승인 2002.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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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에서 돌아온 우리는 이즈밀(Izmil)로 가는 국내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곧장 아타 투르쿠 공항으로 달려갔다. 이즈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 하나인 서머나의 현재 지명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이 거의 터키식 명칭으로 바꿔진 것은 기독교의 잔재를 말끔히 지워 없애려고 한 모슬렘 지도자들의 사악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터키 정부가 서둘러 성경의 옛 도시들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하기보다는 관광객들의 두툼한 호주머니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즈밀에서 잠시 여독을 푼 우리는 날이 새자마자 본격적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순방 길에 나섰다. 강렬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서머나(이즈밀)는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 제3의 도시답게 분주한 하루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사도 요한 당시 서머나는 동방의 어느 도시들보다 정복자 로마의 가이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들은 로마의 종교의식을 위한 신전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여러 건축물들을 정성스럽게 지어 바쳤다. 아마도 요한이 서머나 교회에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권면했던 것은 로마제국에 그토록 충성하듯이 주님께 충성하라는 강력한 권고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지금 서머나 교회는 일곱 교회들 중 유일하게 폴리캅 기념교회라는 명칭으로 보존되어 있다. 주후 155년 2월 23일,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처형되던 날 로마총독은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노라고 제안했지만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열 두번째 순교자로 화형에 처해졌다.

현재 교회 천정에는 불길에 싸인 폴리캅을 한 사람이 칼을 들어 찌르려 하고 있고 폴리캅은 평화스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성화가 그려져 있다. 왼편에 손에 묶인 채 순교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레이온 자신이다.

서머나 교회를 출발한 지 1시간 여만에 우리는 트몰루스 산이 병풍처럼 아름답게 둘러싸고 있는 게디즈 골짜기에 위치한 사데 교회에 도착하였다. 살갗 속까지 깊이 파고들려는 정오의 따가운 햇살을 가까스로 막아가면서 한때 세계 3대 아데미 신전이었다는 폐허지 옆에 간신히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교회터 위에 올라섰다.

그 동안 숱하게 받아왔던 고난의 상처 자국들을 하나씩 들쳐 내 보이려는 듯이 깨어진 기둥 조각들과 돌무더기들은 그 자리들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분명히 그것들은 역사의 진실을 애타게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미 거대한 바벨탑 문명에 길들어져 버린 우리의 눈에는 그것들이 한낱 차가운 돌덩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감상적인 느낌은 두아디라 교회터를 밟았을 때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특히 두아디라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직물 제조업이었으며 당시 소아시아에 사는 유대인들의 주된 직업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빌립보 교회의 여장부 루디아는 두아디라가 속한 리디아 지방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담배와 올리브, 포도나무로 뒤덮인 비옥한 평야 지대를 가로질러 완만한 경사로를 물결 굽이치듯 달려가던 우리들은 거대한 두 산봉우리가 마주 대하고 있는 계곡 입구에 차를 멈추었다. 아! 에베소, 그 감동의 파노라마가 우리 앞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중심지였던 에베소는 계속되는 이교도의 침략과 소아시아를 강타했던 대지진 등으로 말미암아 그 찬란했던 영광과 부귀를 역사의 어둠 속에 오랫동안 묻어두어야만 했다.

이 영원히 멈추어 버린 듯한 망각의 시간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죽음의 도시에 환한 빛과 숨쉬는 생기를 가져다 준 사람은 우드(Wood)라는 사람이었다. 1863년 2월부터 그 본래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 에베소는 지금도 발굴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언젠가 우리 천안대학교가 이곳에 그 힘찬 독수리의 깃발을 꽂고 세계 성서 고고학계에 깜짝 놀랄만한 유물들을 발굴해 보았으면 하는 내 나름대로의 보랏빛 꿈을 꾸어본다.

말이 끄는 이륜 전차를 타고 장군들이 달렸다는 화강암 도로를 따라 5백여m 내려가노라면 양편에서 이오니아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세운 기둥들이 환영의 사열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다.

재판과 토론이 진지하게 벌어졌다는 아고라 광장, 헬라의 비극적 연극들이 공연되었다는 3만 5천명 수용의 대 야외극장, 오만한 얼굴로 누군가를 웅시하고 있는 듯한 트라얀 황제의 석상, 1만 2천 여권의 장서들이 쌓여 있었다는 셀수스 도서관, 장장 9km에 걸쳐 질서 정연하게 배치시켜 놓은 환상의 거리 모습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도 바울이 2, 3차 여행 때 찾아와서 3년 동안 눈물로 전도하며 목회했었고 디모데와 브리스길라, 아굴라, 아볼로, 두기고가 온 힘을 다 쏟아 부으며 복음을 증거했던 에베소, 그러나 바울은 "크다, 아데미여!"를 외치는 성난 무리들에게 쫓겨 이곳을 급히 떠나가야만 했었다.

로마의 가이사는 루비콘 강을 건느면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부르터스의 칼에 맞아 힘없이 쓰러졌고 로마의 찬란한 불꽃도 불과 몇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한편 사도 바울이 피를 토하면서 부르짖었던 십자가의 복음은 소아시아를 건너 헬라 전역에 큰 메아리로 울려 퍼졌고 마침내는 세계의 수도 로마를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만일 에베소를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는 저 코레수스산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칠 것이다. “에베소의 최후 승리자는 가이사 황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었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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