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친일 부패' 세력에 동조...반공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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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친일 부패' 세력에 동조...반공 외쳐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2.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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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사회적 신뢰도 추락 (중) 반공주의 논란

항일 운동 이끌었지만 신사참배도 거부 못해
건국 세력과 결탁, 반공으로 무장 사회구원 외면

“인류의 복리를 위하는 사업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외다. 목사 전도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일을 분담하는 것이니 목사 전도사도 기실 하나님의 일의 일부를 담당함이요, 상공업자나 학자나 기술자도 다 일부를 담당함이외다. 농상공업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리까.”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1917)의 저자이자 평론가 이광수가 ‘금일 조선 예수교회의 결점’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점을 말하면서 기록한 말이다. 당시 지식인들이 기독교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모여 자유당 정권의 절대지지와 충성을 다짐했다.
# 항일운동과 신사참배
한국은 1910년의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35년 간 일본의 압제에 시달렸다. 뒤늦은 근대화로 인해 국제 열방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기독교는 민중들에게 위로와 피난처가 됐다. 그러면서도 종교에 대한 맹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농상공업 등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일임을 강조하며 근면과 성실함으로 일할 것을 호소했다.

선교사들은 반일운동을 도왔다.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 고종은 일제의 을사조약이 황제의 뜻이 아님을 만국평화회담에서 호소하려 했다.

당시 고종이 파견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과 동행한 것이 바로 미국 헐버트 선교사였다. 영어는 물론 국제회의 절차나 행동 방식을 조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한 이후 일제는 한국을 강탈해갔다.

일제강점기에도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교육, 의료, 복지 기관 설립에 앞장섰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916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를 설립하면서 상업을 중요하게 가르쳤다. 당시 한국에서 홀대받던 상인들의 장사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197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기독교의 세계의식을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이 한국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연세대가 기독교의 설립정신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기독교가 항일운동에만 앞장 선 것은 아니다. 일제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했던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거나 투옥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일본의 강점을 지지했다. 이는 해방 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출옥성도들과 신사참배를 용인한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한국 강점을 포기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은 주인을 잃은 땅이 됐다. 하지만 열강들은 한반도를 둘로 쪼개 20세기 전체를 휩쓸었던 이념 논쟁의 불을 지폈다. 결국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 주체적인 독립국가로 서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 해방 전후 기독교의 이중성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하지만 1950년 6.25가 발발,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초토화됐다.

당시 기독교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민중들의 심령을 어루만졌다. 또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소망을 주기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처절한 빈곤에서 벗어나 근대 산업화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독려했다.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김재준 작, 1966)는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번역한 것은 1883년 로엘 선교사였다. 그 이미지를 김재준이 차용한 것이다. 가사를 보면 1960년대 한국이 세계화의 조류에 합류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도 일제강점기,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각 교단들은 해방 정국에서 신학적 문제, 이념 문제, 교단 정치 등으로 인해 분열을 거듭했다. 민중의 분열, 사상의 분열을 끌어안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 통합적이고 포용적인 모습보다는 분열하고 갈등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또 정치와 결탁해 세력화되면서 교회 성장에만 치중했다는 냉혹한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후 기독교는 이승만 세력과 함께 건국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이승만 정부가 부패하고 1960년 3.15부정선거 사건이 발생하자 민중들은 거리에 나서 4.19가 발생했다.

이후 거센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이승만 하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대표들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기독교가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잘못을 지적했어야 했지만, 지지를 보내고 오히려 이승만 정부에 민중들의 봉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써야할 한국기독교사’의 저자 이선교 목사는 당시 한국 기독교에 대해 “목사들은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명서 한 장 없이 침묵했다”고 혹평했다. 이어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기독교는 해방 이후 하나님과 국가를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했다. 신앙을 버리고 민족을 반역한 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개화기 기독교가 민족의식과 세계의식을 고취시켰던 것과 달리, 해방 전후 기독교는 역사의식을 잃어버리고 시대정신을 읽지 못했다.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이 보여줬던 교육, 복지 등에 대한 관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세계의식 성장 등 사회구원에 대한 관심은 점차 잊혀져갔다.

신사참배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 건국 정부의 부패에 대한 따끔한 질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기독교는 반공사상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다. 이념 갈등의 그늘에 숨어 과거의 잘못을 감춘 것이다.

이 시기부터 한국 교회에서는 개교회주의, 개인구원 등이 강조됐고 시대와는 유리된 종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킨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를 바탕으로 대형교회를 키우며 몸집을 불려갔다. 이 같은 흐름은 군사독제 시대와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공고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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