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기 한국 사회의 세계인식 확장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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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한국 사회의 세계인식 확장에 기여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2.0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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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무너진 한국교회, 다시 세우자 ③ 사회적 신뢰도 추락 (상) 근대사와 교회

▲ 1909년 선교사 찰스 알렉산더와 한국 성도들이 평양 집회에서 백만인구령운동 주제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
17.6%. 지난 2010년 한국 기독교가 받은 신뢰도다. 이 조사에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무려 48.4%에 달했다. 호감 종교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그 심각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가톨릭은 35.5%, 불교는 32.5%의 응답을 받은 반면, 기독교는 22.4%에 그쳤다.
일반 대중 대다수가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도 않고,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사 대상의 18.3%가 자신을 개신교 신자라고 밝힌 점을 감안하면 개신교 정체성을 가진 신자조차도 한국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최근 2~3년 사이에 신뢰도가 더 떨어졌다는 사람도 26.6%에서 30.8%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는 방증이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가 크게 추락한 이유를 놓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신뢰도가 추락한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행적을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추락 과정과 배경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편집자 주>

세계 교회, 한국의 가능성과 역량에 주목
1% 기독교인 항일 독립운동 앞장서

한국의 이름이 유럽에 알려져 세계의 일원이 된 것은 1253년 한 선교사에 의해서다. 로마 가톨릭 프란체스코 선교사로 몽고에 와 있던 귈리암 루브루크가 교황청에 보낸 글에서 최초로 우리나라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능화의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에 따르면 당시 루브루크 선교사는 “추운 겨울날 압록강까지 왔다가 저 건너편에 고려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이름이 ‘Korea’로 알려져 오늘에 이르렀다.

# 한국의 발견과 세계와의 만남
서구의 교회들은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832년 6월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를 타고 한국에 온 네덜란드 선교회 칼 구츠라프 선교사는 제주도에 당도한 후 “한국의 최남단 제주도는 그야말로 매혹적인 섬”이라며 “아주 쉽게 일본이나 한국 본토 및 중국과 같은 여러 나라와 교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 파견원으로 와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1866년 당시 한국인에 대해 “일본인이나 중국인에 비하여 그 지성과 성품, 생김새 그리고 윤리적 감각이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와 역사, 지리적 위치, 지하자원, 수운, 이런 모든 환경이 다 한국의 월등한 세계적 일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적었다. 민경배 교수(백석대 석좌)는 저서 ‘글로벌시대와 한국, 한국교회’를 통해 당시 선교사들의 이 같은 관심을 소개하고 “이는 반드시 선교해야 할 나라라는 뜻이며, 이를 통해 한국이 세계무대에 서게 될 것을 내다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은 기독교에 의해서 서구에 알려졌으며, 또한 기독교에 의해서 그 가능성이 발견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한국이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서구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의 영향을 받은 설명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관찰자나 방관자에 머물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은 기독교를 통해 세계가 중국, 일본만이 아니며,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선교사들이 보여줬던 기독교 선교의 확장성, 이념과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성이 지금 한국 사회의 발전과 도전적 역할, 역동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 한국의 근대화와 교회의 기여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교육’이다. 물론 성경, 영어 등 그들의 필요에 의해 시작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사, 서양사, 문화인류사 등을 가르쳤다. 이와 함께 국사, 한글 교육을 통해 한국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를 통해 세계지식을 눈뜨게 하고 세계인으로 준비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세계의식은 한국 교회 최초의 찬송가에서도 드러난다. 알렉산더 피어타스는 1894년 찬송가 ‘내가 일심으로 쥬를 기리고’(내가 한 맘으로)를 만든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찬송가에서 그는 하나님이 만국의 왕들이 기리는 분이시라는 것을 외친다. 세계질서와 역사를 드러내면서 세계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찬송 ‘주여 우리 무리를’에서는 천하만국 백성, 세상, 열방, 땅의 모든 끝들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러면서도 ‘우리 무리’라는 표현을 통해 민족의식을 세우고 있다.

민경배 교수는 “1905년 안창호는 기독교가 만국의 통교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면 천하에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며 “기독교의 세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영향을 받아 1907년 윤치호가 만든 ‘찬미가’에서도 세계성이 드러난다. 애국적 내용과 함께 세계의식, 강렬한 선교적 열망을 담았던 것이다.

한국의 근대사를 조망하면서 1907년 평양대부흥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 대각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한국 교회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기독교 국가로 부상했다.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이 앞 다퉈 특파원을 보냈고 세계 명사들도 한국을 잇달아 방문했다. 평양대부흥을 통해 한국이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만국평화회담이 개최됐다. 이때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 이상설, 이준 세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이위종은 “우리는 기독교란 이름으로 세계적인 원조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말이다. 기독교 정신이 죽어 있지 않다면 꼭 이룰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들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라면 세계적인 안목으로 한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종은 이 일로 인해 폐위 됐고 일본은 1910년 강제 합병을 통해 식민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 시기 기독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또 세계의식을 가지고 서구 열방을 향해 독립을 호소했다. 선교사들의 기도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독립운동의 중심에 선 기독교
기독교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료들을 통해 드러난다. 한국 사회가 일제의 폭거에 가장 크게 항거했던 3.1독립운동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교회의 소재지를 그린 지도와 3.1운동 발발지역을 그린 지도를 겹쳐놓으면 꼭 들어맞는다. 교회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번져나갔다는 것이다. 또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지만, 기독교인 수감자는 25%에 달했다.

민족을 대표한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절반에 해당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YMCA 명예총무 전택부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남선 역시 자신의 사상에서 기독교적 영향을 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밝혔다. 3.1 운동을 지켜본 서구 사회는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교회는 동양문제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 독립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의 세계사적 운명을 좌우한 항일운동의 중심에 기독교의 세계정신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과 양심은 그대로 민족의 자긍심과 진취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기독교의 세계의식은 한국의 독립을 세계사적인 과제로 승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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