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양적성장, ‘산업화 경제논리’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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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양적성장, ‘산업화 경제논리’ 숨어 있다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2.01.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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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무너진 한국교회, 다시 세우자 - ② 성장제일주의 ‘명과 암’ (상) 교회성장의 배경

▲ 한국 교회는 양적성장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 집회를 자제하고, 세속주의에 빠져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집회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에서 유례없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교회성장은 정체됐고,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감소되고 있는 추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성장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영적으로 건강하고 단계적인 성장이 아닌 기형적인 폭풍성장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장제일주의는 교회에 어떤 영향은 끼쳤을까. ‘양적 성장은 곧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라는 관념 속에서 여전히 고질적인 병폐로 남아 있는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건강한 성장, 곧 ‘성숙’의 방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970년대, 경제적 근대화 성취를 신앙의 성취로 인식하는 경향 보여
기형적 성장 후유증이 ‘둔화’와 ‘멈춤’으로 나타나 교세 급격히 감소


한국 기독교 역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즉, 이 시기는 한국 교회 역사상 교회와 교인의 수가 그 어떤 시대보다 급증한 현상이 나타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경이적인 교회성장
지난 1993년 한국종교사회연구소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1950년에 3천114개였던 교회는 1960년대 들어 5천11개로 증가했고, 1970년 1만2천866개, 1980년 2만1천243개, 그리고 1990년에는 3만5천819개로 각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10년 단위의 증가율로 살펴보면 1960년과 1970년 사이는 157%가 성장했으며, 1970년과 1980년 사이는 65%, 그리고 1980년부터 1990년 사이는 약 69%가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 한국의 교회 수는 7배 이상 증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교회 수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교인의 증가로 이어졌다. 1960년대 1백50만이었던 한국 교회 성도는 70년대 들어 3백만 이상으로 증가했고, 80년대 이후 7백만 이상으로 증가했다는 여러 통계들이 나와 있다. 특히 이런 성장은 오순절 계통을 비롯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거의 모든 교파에 걸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약적인 교회성장은 무엇보다 목회 현장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1984년 8월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며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됐던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대회’에는 대부분의 교단들이 공식적으로 참여하며 국내외에서 약 350만 명 이상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가하는 등 세계 교회와 한국 사회 앞에 한국 교회의 저력을 과시하는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 독재정권 시기의 물량적 경제성장
그렇다면 이 시기 한국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한 교회부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이나 불교와 같은 타 종교도 개신교, 곧 한국 교회 못지않게 많은 성장을 이룩했다. 바로 이 부분이 단순히 영적 측면에서만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을 설명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사실 시대적, 사회적 측면에서 교회성장에 대한 원인과 이유를 분석한 기독교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박정희 정권’ 시기에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1961년 5월 당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분단’이라는 구조 속에 머물고 있었던 한국 사회를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기초해 군사독재를 구축해나갔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군사독재의 시기에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보고, 모든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시기의 경제성장은 한 마디로 수출을 중심으로 한 물량적 경제성장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박정의 정권하에서의 경제개발은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농촌의 피폐, 부의 편재, 만성적 인플레이션 등의 문제를 양산하면서 국가 경제는 괄목할만한 외형적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룩했지만 그 성장의 열매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즉, 당시의 경제성장은 사회의 계층구조를 피라미드형으로 경직시키면서 그 구조의 아랫부분에 놓이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증대되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도시가 주는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기회에 이끌려 농어촌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화된 산업사회의 생존경쟁과 함께 파생된 물질주의와 배금주의적 가치관은 공동체 및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고, 각 사람의 자아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또한 지배층의 세력들은 정치와 경제가 유착된 상황을 이용해 법과 규칙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도덕적 타락과 법이 경시됐고, 결국 사회 전체에 부도덕, 요령주의, 편법주의를 만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반공주의, 군사적 국가주의, 관료주의, 성장만능주의 등이 확산됐고, 결국 한국 사회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을 상실한 채 혼돈상태에 빠지게 됐다.

# ‘양적 성장’, 산업화 산물인가
바로 이러한 독재정권 시대의 ‘경제발전’이라는 산업화 속에서 한국 교회는 급성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종교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좋은 장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한 한국 교회는 산업화 과정이 만들어 낸 ‘개인주의’와 잘 어울려 그 어떤 종교보다도 더 좋은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의 양적성장은 시대적, 사회적 기류에 자연스럽게 편승돼 이루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분단과 개발독재 상황이 조성한 심리적 불안감, 정치경제적 불균형, 사회적 불만,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은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불공평한 경제구조 속에서 느끼는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찾았다. 한국 교회는 경제 이익의 분배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현세적,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며 강력한 보상적 기대로 작동한 것이다.

특히 이 시기 한국 교회는 현세적 복에 대해 강조하면서 큰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물질적 차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성공하도록 동기유발하며, 그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했던 교회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적극적 사고, 성공의 복음, 풍요의 복음 등 자본주의화 된 축복의 메시지는 이 시기에 크게 번창한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설교 내용이기도 했다.

# 경제개발 논리 그대로 수용
물론 한국 교회 성장을 이러한 사회적 배경, 곧 산업화와 같은 외적인 요인들 때문이라고 결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파악해 그 수요를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사회의 혼란과 불안감에 적절한 대안과 피난처를 마련주면서 성장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 교회는 질적 성장보다 양적 성장에 치중한 것 또한 사실이다.

교회성장에 효율적인 새로운 신학과 방법이 대거 도입됐고, 경쟁적이고 적극적인 교세확장 운동과 부흥운동이 범교단적으로 진행됐다. 각 교단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000만 성도, 000 교회’라는 양적 교회성장의 구호를 내세우며 다양한 전도활동을 펼쳤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러한 교세확장 운동은 신자 수, 교회당의 크기, 헌금 액수, 예산 규모 등 가시적 수치를 드러날 수 있는 것을 중시하게 됐고, 결국 물량주의에 지속적으로 빠져 들게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양적 성장을 위한 초교파적인 집회 형식을 지닌 부흥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1974년 ‘엑스플로’, 1977년 ‘민족복음화성회 등이 서울과 지역에서 여러 차례 개최됐고, 이러한 집회는 대부분 연 인원 수백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회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양적성장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경제개발 논리를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기독교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지배적이며, 목회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한국 교회는 경제적 근대화의 성취를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한국 교회는 경제개발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사회를 구축한 개발독재체제 아래서 호기를 만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전시체제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전 국민의 역량을 동원한 개발독재체제의 국민동원 방식을 한국 교회가 그대로 수용했다는 지적이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정권 하에서 빈번히 계속된 대규모 집회 방식 자체가 국가의 총동원 전략을 그대로 닮은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개별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최 목사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또한 경제적 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적으로 변용된 것이었다”며 교회는 경제개발의 성공체제를 그대로 모방했다고 비판했다.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급속한 경제성장,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한 병폐를 그대로 안고 있는 한국의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 이면에도 여러 병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결국 한국 교회 기형적 성장의 후유증은 1990년대 이후 ‘둔화’와 ‘멈춤’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고, 현재 교회 및 성도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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