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찬송가’와 ‘복음성가’는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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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찬송가’와 ‘복음성가’는 구별해야 한다
  • 승인 2002.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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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는 복음송 홍수시대를 만났다고들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많은 곡들이 창작되고 많이 애창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문화창달과 신앙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기독교 음악은 예배행위와 관련해서 예배찬송을 규정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고, 복음송(가)을 비규정적 생활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영역의 음악이 오늘날 예배음악으로 혼합되어 무분별하게 예배에 채택이 되는 사례는 예배의 본질적 의미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예배음악은 예배의 요소로서 찬양곡이어야 할 원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종교음악을 채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입례송이나 송영곡, 찬양대의 찬양곡, 지명된 사람의 특송, 기타 순서에 도입되는 별곡 등이 예가 될 수가 있고 기타 예배시에는 회중 찬송을 복음가로 대체하여 부르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 모든 집회 때나 예배 전 찬송도 거의가 복음송을 도입함으로 전통적 예배 찬송곡의 개념의 혼란마저 온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배찬송과 복음성가는 예배적 지위와 기능이 같을 수 없고, 교회사적 배경과 영감적 동기와 요소도 같지 않다. 물론 복음송도 기독교적 사실과 성경적인 문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작시·작곡의 영감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예배찬송가는 구속사의 본질적 체험요소와 하나님의 존재와 신적 역사의 생생한 경험적인 감동이 응축되고 그리스도의 우주적 사역의 총체적 송축이 교회사적 여과 과정을 거쳐 표출된 예배음악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공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정곡(正曲)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찬송가는 인간이 신적 영역에 대한 찬양이요, 송축이며 그의 영광을 예찬하는 것이 중심이라면 복음송은 인간의 종교심성의 고양과 탐미주의(耽美主義)적 정서의 만족과 그리고 기독교적 기상의 발현이며 일체감과 단합을 도모하면서 자기만족을 노래행위 속에서 누리려는 실리적 동기가 배합된 실용음악으로 볼 수 있으므로 복음송을 애창은 하되 예배찬송과는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찬송’(Hymn)의 신학적인 의미를 보면 첫째, “하나님께 찬양이나 감사를 드리는 노래”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이러한 노래를 총합한 오래된 책이 시편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래를 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등이다(엡5:19, 골3:16). 주님은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시편을 찬송하였다(시113-118, 마26:30, 막14:26). 그리고 엡5:14과 딤전3:16의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의 오래된 찬송을 간직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교인들은 관례적으로 찬송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행16:25, 고전14:26, 엡5:19, 골3:16).

둘째, 또 다른 한편의 찬송(praise)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섭리사역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경건의 주된 요소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고 있지만(시22:23, 계19:5, 시135:19∼21, 사12:6),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시67:3-5, 117편).
이렇게 찬송가와 찬양하는 것은 계시적 근거를 가진 것으로서 구속 백성의 필수행위인 것이다. 복음송은 예배적 의미보다는 신앙적 감성과 자기 치유적 기대 심리를 해소하는 종교적 의미가 있는 반면, 찬송가는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감응적으로 예찬함이며 신적 체험요소를 반영한 신 중심적으로 창작된 것이 찬송가인 것이다.

그런고로 복음송을 기독교 음악문화 영역에서 높이 평가하고 애창하되 예배 찬양곡으로서는 차별해야하며 기존 찬송가 애창을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김석한(기독신학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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