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과목, 변증적으로 가르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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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과목, 변증적으로 가르쳐야
  • 승인 2002.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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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기독교 대학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편은 크게 두 가지다. 그것은 채플을 통한 것과 기독교 과목 강의를 통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 가운데 불신 학생일 경우 채플과 기독교 과목 강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이와 같은 현상은 일반적이라고 하겠지만 만약 복음 전하는 자들의 저들에 대한 몰이해와 비효과적 선교전략으로 인해 그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문제라면 이것은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여기서 소위 문제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의 문제를 말하는 것인데, 문제는 믿음 없는 자들을 향해 복음이 너무 선언적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채플에 대한 불만
2001학년도에 천안대학교 채플에 참석한 3772명을 대상으로 채플이나 기독교 과목에 대해 만족도를 설문 조사했을 때 응답자(기독교인-1,343명, 비기독교인-1,501명)중 기독교인일 경우 43%가 채플은 유익하며 필요하다고 답변했는가 하면, 비기독교인 일 경우 약 6%만 유익하며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기독교 과목에 대해서는 기독교인 일 경우 잘 이해 할 수 있다가 약 33. 8%인데 반해 비 기독교인일 경우 13. 6%만 잘 이해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 과목이 너무 전제적이고 주입식이라는 응답은 기독교인 38. 9%, 비기독교인 약 47.7%로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채플과 기독교 과목에 대한 전체적인 만족도와 그 효과는 결코 높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복음증거의 방법론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으로서의 특성이 강한 곳이다.
그렇다면 복음도 이 곳에서는 선언적이기 보다 가르치는 형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믿음이 없는 자를 대상으로 설명하고 풀이하는 복음, 이것을 ‘기독교 변증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성경은 복음의 변증적 접근을 얼마든지 지지하고 있다.

‘변증’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는 복합적이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추론에 의해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 또는 초월적인 대상을 다루면서 경험의 세계로 넘어 나아가고자 할 때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 혹은 이성이 범하게 되는 모순에 대한 비평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은 “변증학은 각양 각태의 비 기독교적 생의 철학과 대결하는 기독교적 생의 철학의 변호이다”라고 했고, 알랜 리차드슨(Alan Richardson)은 “변증학은 우주와 그 속에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도모하며 촉구하는 학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는 “변증학은 기독교의 진리와 사실을 학술적으로 변호하고 증명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추론에 대한 불만
신학에는 성경 외적인 자료들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성경을 우리들의 상황에 연관시키려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전제된 자를 위한 신학에도 성경 외적인 자료들이 그 도구들로 이용되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변증학에서 성경 외적인 도구들이 성경을 증거하기 위해 철학적, 역사적, 과학적 방법들이 동원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신학에서 그렇게 취급하듯이 성경 외적인 도구들이라 해서 비성경적이거나 불경건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성경 외적인 증거들이 성경적 입장에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증거들은 기독교를 위한 논증에서 유익한 것이며 효과 있는 것이다.
사실 불신자는 성경 외에 근본적으로 자연과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 속에서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증거를 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변증가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물론 변증가는 증거를 제시함에 있어서 동시에 성경을 적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 증거를 성경적으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로 이런 방식이 성경의 진리를 드러냄에 있어서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전제주의적 경향에서는 증거에 대한 이러한 실제적 분석이 매우 약한 것이 사실이다.
개혁주의적 성경 무오성의 정의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당한 학문적 성취결과의 합당한 도구화는 요긴한 것이다.

실존이 증거하는 계시들
하나님은 변증의 하나님이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런데 지금껏 복음은 전통적으로 전제된 하나의 형식으로 전락되곤 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ABC 복음’이라는 형식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일률적으로 이것을 적용하였다.
A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요, B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요, C는 “모든 인간이 이 진리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요, 위에 열거된 순서에 따라 증거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전혀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간 이성을 향한 호소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13:34)는 것은 어떻게 이 복음이 우리에게 ‘이해되어야’하는 복음인가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주께서 날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자연계시의 중요성과 그것을 해득하는 인간 이성을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교수법 개발을
복음의 진정한 합리성을 희생시킨 채 전제되어야 할 믿음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오직 종교적 체험만 중요시한다면 오늘날 진리를 대항하여 늘어서 있는 무수한 사상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서 지성인을 상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은 언제나 기독교가 무엇이며, 그것은 현대의 여러 사상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또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믿음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복음의 변증적 접근이 복음증거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을 결코 과소평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대학에서 지성인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교수들의 변증적 교수법이 요구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제안하고 있는 변증적 교수법은 효율적 복음증거의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효과적 복음증거를 위한 다양한 교수법이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 대학의 모든 크리스챤 교수들이 그들의 학문적 성취를 성경적 기반 위에 정립함으로서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한다면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효과 있게 증거 되리라 확신한다.

주만성(천안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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