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글씨
상태바
손으로 쓴 글씨
  • 승인 2002.01.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컴퓨터가 찍어내는 세련되고 완벽한 글씨가 싫다. 멋도 내고 주소와 이름 쓰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만든, 깔끔하고 멋진 봉투의 반짝이는 셀로판종이 창을 통해 보이는 컴퓨터가 쓴 글씨가 싫다.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빈틈이 없어서 도대체 인간미도 없고 감동도 없어서 싫다.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를 맞는 최첨단 과학문명시대에 오히려 ‘옛날 손짜장’장사가 인기가 있고 ‘전통묵집’에 사람들이 모이고 황토방에 주부들의 관심이 쏠리며 전통 수제비집에도 손님들이 만원인 이유가 무엇일까? 도시의 월급쟁이들은 호젓한 시골의 전원주택을 꿈꾸고 여름이 되면 대자연 속에서 흙과 물, 나무와 돌을 체험하는 각종 수련회라는 프로그램이 날로 번성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일궈보며 서투른 농사 실력을 통해 떡잎을 쓰다듬고 잡초를 뽑으며 흐르는 땀에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IT와 NT 기술로 멋지게 디자인된 컴퓨터의 무감각한 자판이 만들어내는 편지와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다보니 우리 삶은 어느새 따스함은 사라지고 나만을 위한, 지극히 나만을 위한 싸늘한 이기심만이 넘치고 있다. 계산된 만남과 대화, 좀더 확실한 이익과 정확한 계산을 위해 전문가의 컨설팅까지 동반된 우리의 만남과 커뮤니케이션이 우리 주변의 손바닥 만한 따스한 공간을 점차 사라지게 하고 있다.

컴퓨터 자판의 ‘ㄹ’을 치면 언제나 아무 때나 흐트러짐 없는 똑같은 ‘ㄹ’만이 나오지만 손으로 쓴 ‘ㄹ’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상쾌한 아침과 졸린 저녁에 따라 모양도 각색이다. 약간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힘있기도 하고 맥없어 보이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야성적이기도 하고, 옆으로 삐뚤어지기도 하고 반듯하게 서 있기도 한다. 모양은 멋지지 않고 깔끔하지는 않아도 손가락을 통해 체온이 전해진 손으로 쓴 글씨는 인간적인 따스함이 전해지기에 멋과 감동이 있다.
mass(대중)시대에 개성이 사라지고 매스미디어에 의해 정형화되어 인간미가 없어진 자판의 작품이기에 딱딱하게 세련된 컴퓨터 글씨가 싫다.

이제 2002년의 새로운 한해를 맞아 우리 크리스천들은 점점 식어 가는, 계산된 우리사회 속에서 따스한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미를 보존하며 그것을 펼쳐가야 한다. 수많은 DM(direct mail)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날라오는 짜증나는 e-mail의 기계적이고 감정 없음에 우리마음도 점차 온기를 잃어가고 있다.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 듣는 이에게 감동을 유발시켜 그들의 가슴속에 동감(rapport)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기에 감동이 사라진 시대에, 듣는 이에게 말이나 글을 통해 진한 감동을 주는 일은 또다른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컴퓨터가 찍어낸 수많은 카드와 연하장들이 우체통을 가득 메우고 소리도 없는 e-mail이 씁쓸한 감상에 젖게 하던 연말연시가 지나가고 있다. 우상도 하나요, 대화의 주제도 하나인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 mass production시대에, 컴퓨터 자판의 엔터(enter)를 치기만 하면 화면이 떠오르고 해답이 나타나는 단순화 되어 가는 사이버 컴퓨터 시대에, 가끔은- -정말로 가끔은--손으로 붓셈을 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각하는, 여백 있는 사람이 그립다.
우리의 친구와 동료, 이웃을 위해 손해볼 수 있는 멋진 용기가 있고,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손으로 쓴 글씨같이 부드럽고 푸근한 사람-- 이 그립다. 1000원을 베풀었다고 1000원을 기대하지 말자. 더군다나 2000원은 생각지도 말자. 아무 계산 없이 베풀어보자. 바보같이 베풀어 보자. 어수룩한 사람처럼 베풀어 보자. 마치 용기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셨던 아가페의 사랑 같이 말이다.

진정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은 비록 소리는 요란하고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조용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잔잔한 물결을 메아리처럼 퍼지게 하듯 듣는 이의 마음속에 따스한 감동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박찬석(천안외대 영어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