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대학의 세계관…사회 제분야에 '기독교원리' 적용 방안 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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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학의 세계관…사회 제분야에 '기독교원리' 적용 방안 강구
  • 승인 2001.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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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을 가진 서구의 기독교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계관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주로 경건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여 왔다.
전자가 세계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전인적인 구원과 신앙을 말할 때에, 후자는 주로 영적인 면의 구원과 신앙을 말해왔다. 물론 이러한 특징을 서구의 모든 교회와 우리 나라의 모든 교회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하더라도 그 대략적인 특징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신앙과 삶 우선 학문이란 분야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영역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학문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분야인가 하는 질문이다. 먼저 학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분명히 해야 하겠다. 학문이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을 체계화하여 연구하는 작업이다. 숫자를 가지고 작업하는 활동을 연구하는 것은 수학이요, 재물과 돈을 다루는 활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경제와 경영학이요, 인간신체의 작용과 치료를 다루는 활동은 의학이다.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과 그 기준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윤리학의 분야이다.

인간의 학문적 활동에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두시는가? 십계명을 살펴보자.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지식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명이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여섯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삶을 일정한 틀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한 틀에는 살인과 간음에 관한 계명과 함께 거짓에 관한 계명도 포함되어 있다.
잠언 11:1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가르친다. 이어지는 2절은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로 이어지며, 4절은 재물에 대해서 가르치고, 9절은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친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 14:8)라는 가르침은 살아서 하는 어떤 행동과 활동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영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가? 에베소서 5장과 6장은 빛의 열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해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그리고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것에대해서 가르친다. 그 후 5장 22절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합당한 “범사”를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도 영적인 신앙은 반드시 삶에 표현되고 살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 무엇을 하던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여기 말하고 있는 ‘무엇을 하던지’, 그리고 위에 언급한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과 “범사”는 분명히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삭개오의 예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가 한 말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구원의 확인, 즉 영적인 신분에 대한 확증을 해 주셨다 (눅 19:8-9).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구원되고 영혼이 변화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은 그러한 변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의 “경제적인 삶”의 변화만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영적인 변화는 돈과 재물을 다루는 경제적인 활동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신앙과 학문 성경은 영적인 변화와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분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삶의 변화는 구원의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사항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혼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삶도 변화시킨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를 기도와 찬송으로 유도할 뿐만 아니라, 순종과 공의로운 삶으로도 인도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학문을 해야할 이유와 목적이 있다. 기독교 학문이란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활동을 기독교적인 시각과 원리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변화시키는 삶, 즉 ‘인간이 행하는 것’과 ‘범사’에는 학문도 적극적으로 포함된다. 학문이란 인간의 활동, 즉 범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학문이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범사의 삶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 학문은 구원의 시각으로 학문을 하도록 구체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예를 다시 사용한다면, 삭개오에게 일어난 경제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현대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학문의 한 예이다.

기독교 학문의 예 기독교 학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일반 학문에다가 기독교적인 윤리나 구제를 더한 것인가? 예를 들어서, 기독교적인 경영이란 이미 하고 있는 세상적인 경영에 얼마간의 액수를 구제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세상적인 경영을 기독교적인 윤리 행동으로 행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은 세상적인 경영을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술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위에서 기독교 학문이란 기독교적인 원리와 기초 위에 세워진다고 하였다.

기독교적인 원리와 기초란, 평범한 말로 표현했을 때, 구원이 요구하는 삶의 근본 원리이다. 다른 표현으로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삶에 요구하는 구체적인 원리이다.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표현할 때에, 그것은 죄로 타락한 경제활동을 성화시켜가는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원래 창조세계에 하나님께서 두셨던 인간의 경제활동이 타락으로 인해서 부패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다시 원래의 경제활동의 원리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가깝게는 개인의 돈 경영이나 한 가정의 경영에도 적용된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경제나 경영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하여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리와 기초로 수행하는 기본적인 작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 학문의 작업은 수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다시 경제를 예를 든다면, 모든 현대 경제의 시스템이 적은 자본으로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어떠한 방법도 사용하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일반 경영의 원리가 수정할 수 없을만큼 이 세상에 확고하게 퍼져있으므로, 기독교적인 경영은 할 수 없이 세상적인 경영의 기초에 단순히 일정한 액수를 구제로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경제의 목적과 과정을 재정립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그러한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가?

위에 든 경제의 예는 백석학원의 교수 대표들이 2001년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미국의 칼빈대학을 방문해서 그 곳의 교수들과 진지하게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이다. 이 예는 기독교 학문이 부딪히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면서 그 일에 전념하고 있는 경제학 교수가 수 십명에 이르며, 그들이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매년 컨퍼런스를 가지며 서로의 연구작업을 공유하고 전문지에 발표하며, 그러한 원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독교 학문의 작업은 철학에, 의학에, 물리학에, IT에 기독교인 전문교수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삶을 구원으로 성화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소명이라면, 그 삶은 “범사”를 포함하기 때문에, 범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기독교 학문 또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기독교 학문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위에 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도구이다.
변화하는 삶이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면, 변화하는 학문 또한 구원에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성화의 삶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듯, 학문의 변화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학문의 영역에서도 살아나야 한다. 심재승(백석학술원 책임연구원·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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