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원리 도입으로 영적인 교회본질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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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경영원리 도입으로 영적인 교회본질 훼손
  • 송영락
  • 승인 2007.11.08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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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시간차’만 있을 뿐 미국교회의 성장과 침체 모델
▲ 존낙스가 설교하고 또 투옥되기도 한 앤드루스 성의 유적. 낙스의 초기 활동 무대였던 이곳에서 그는 열정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한국교회는 올해도 종교개혁주일을 지켰다. 다양한 학술과 문화행사를 통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렸다. 총신대는 ‘종교개혁 부흥, 그 이후’를, 고신대는 ‘개혁교회와 부흥’을, 안양대는 ‘개혁주의와 시대정신’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 등을 통해 한국교회의 개혁과 사회 속에서의 바람직한 역할을 모색했다.


하지만 지난해 종교개혁 489주년 이후 교단이나 학계 등에서 종교개혁의 의미와 취지를 되돌아보는 기념식, 세미나가 열렸지만 정작 개혁의 실천자가 되어야 할 한국교회는 실천적 외침이나 움직임이 없었다. 이번 종교개혁도 지난해와 다르다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 반복이 아닌 개혁을 위한 몸부림이 필요한 시기이다. <편집자 주>


개혁과 혁명은 주체가 다르다. 혁명은 소외받고 천대받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면 개혁은 지도자들의 자기반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개혁이란 기존의 질서나 제도의 타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 갱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를 향해 오직 성경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간과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것은 새로운 개신교의 탄생을 목적으로 한 외침이 아니라 진정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단절과 변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잘못된 관행과 제도로부터의 단절이 없는 새로운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단절은 한국교회가 가장 필요한 영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변질된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경 본래의 회복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 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 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변해버린 구석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기관과 단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속에 하나님은 뒷전에 두고 사람들의 소리만 무성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보니 말씀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간의 냄새에 싸여 성직자의 부패 타락성을 사회에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최근 기독교출판사가 출판하고 있는 서적들을 보면 ‘CEO=목회자’라는 등식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가 이익을 만들어내는 CEO로 표현하는 것은 성장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문경영인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표면적인 성과를 거둬야 한다. 경영이 개선되거나, 기업의 이미지가 좋아지든지 등 외형적인 성장을 보여줘야 한다. 외형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계약이 취소되거나 도태되기 때문이다.

요즘 대형교회들은 대형교회대로 줄어드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다양한 교회성장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중형교회는 중형교회대로 교인배가운동, 이슬비전도편지 등 있는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내고 있고, 개척교회는 그 틈바구니에서 숨 돌려 안정을 유지할 시간도 없이 쫓겨 가고 있다.


요즘 신학자들을 만나면 ‘한국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말한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에 대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은 없지만 교회성장에 대한 논리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시장논리가 교회와 목회자를 평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장논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이벤트’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둔화되고 교회의 분열과 신학적 갈등, 긴장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시간차’만 있을 뿐 미국교회의 성장과 침체 모델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교회가 1940~60년의 ‘교회성장기’, 1960~1970년의 ‘교회침체기’를 거쳐 1970년 이후의 ‘교회쇠퇴기’를 겪었다. 미국교회는 2차대전과 한국전을 거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초고속 성장을 하다가 1960년대 대학생, 여성, 히피, 흑인파워가 등장하면서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침체기를 극복하지 못한 미국 교회는 이후 지금까지 매 10년 단위로 수백만 명의 신자를 잃고 있다.

 

시기와 장소만 다를 뿐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행로를 그 실패의 길까지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초고속 성장세가 1990년 전후까지 20년 동안 계속됐지만 1990년을 전후해 ‘민주화’ ‘다원화’ 과정에서 젊은이와 인권운동가, 지식인들이 교회를 이탈하면서 ‘현상유지’ 내지는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목회자의 성공신화’ ‘대형교회의 꿈’ ‘세습’ ‘교단정치’ 등 ‘사이비 복음’에 대한 부정으로 급속한 쇄락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으면 세상도 중생할 수 없다. 사람이 바뀌어야 환경이 바뀐다.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처럼 특별한 예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제자훈련, G12, 아버지학교, 가정학교, 큐티모임, 다락방, 순장모임이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교회성장이벤트를 포장만 바꿔 고급화시킨 꼴이라는 점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영적권위를 회복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성운동이다. 중세기말 성직자의 타락, 그 영적 폐허의 현장에서 나온 경구는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는 말이었다. 오늘 우리가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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