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집]"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교회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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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집]"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교회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 이현주
  • 승인 2007.08.1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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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한국교회사로 본 오늘날 교회의 과제

 

 

1945년 8월15일. 역사는 이 날을 뜻깊게 기억하고 있다. 일제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난 날이며 자주독립국가의 주춧돌이 된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력에 의한 해방이 아니었다는 점과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이후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됐지만 그래도 해방은 분명 우리 국민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6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금 더 깊이 속내를 들여다보면 해방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선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문서에 “조선민족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집단은 기독교”라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한국교회는 해방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숱한 탄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던 힘은 바로 ‘하나님께’ 있었다. 일제 통치 기간 신사참배와 친일 등으로 훼절의 길을 걸어간 교회의 모습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오욕의 역사만 기억하기엔 당시 기독교의 해방을 향한 열망과 기도는 너무도 뜨거웠다.


해방전후 교회의 공과 과오는 이미 역사적인 검증을 받아왔다. 일제 통치 초기부터 민족운동의 싹을 피운 교회는 30년대 중반까지 교파분열을 계속하면서도 부흥과 자치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이면에는 신비적 부흥운동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는 하나 교회는 안팎으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펼쳐왔다.


하지만 1935년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박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교회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기록되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나아가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전개하며 외국인선교사 철수와 신학교 폐교, 신사참배 반대 기독교인 체포 등 잔악한 종교탄압을 강행했다.

1939년 일제는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키며 교회설립을 강제하기에 이르렀고 신사참배로 중심을 잃고 무너진 교회는 부일협력이라는 변절을 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와 부일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 친일과 탄압에 저항하며 교회를 지켜온 힘이 있었고 그 힘은 살아서 결국 조국의 해방을 목격하는 꿈같은 일을 가능케 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후반 각 교단들이 신사참배와 일본적인 교단으로 재탄생을 선언할 때 많은 교계 기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 징용에 반대하며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싸웠다. 산정현교회 주기철목사는 “신사에 절하는 것은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5차례의 옥고를 치렀고 한상동, 박관준, 안이숙 등과 교류하며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의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5번째 수감 중 결국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순교하고 말았다.

기독교 역사학자 민경배박사는 “일제하의 아픔과 고통, 수치, 학대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역사의 계시를 보았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 어깨조차 펴고 걷지 못하던 한국사회에 기독교인만이 고난을 달가이 여겼고 용기를 품고 움직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순교를 각오한 민족운동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독교인에 대한 노골적인 핍박을 드러낸 일제는 국내 반일세력을 찾아낼 목적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일제 최대의 한민족 탄압사건이었던 105인 사건은 더불어 한국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 기독교 박해사건이라고 교회사학자들은 이야기한다. 105인 가운데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당시 민족운동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실이다.

나아가 서울신대 허명섭박사는 “1945년 8월18일을 기해 한국 기독교인 2만여 명에 대한 대학살 계획을 일제가 수립했지만 불과 사흘을 앞두고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일제가 대학살을 하려던 이유는 신사참배 거부를 비롯해 일제의 시책에 끝까지 저항하던 한국교회의 마지막 신앙인들을 숙청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허박사는 “흰옷을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며 해방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했다.

해방은 한국교회의 신앙을 근원부터 제거하려 했던 일제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되찾고 동시에 오욕으로 점철된 교회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허명섭박사는 강조했다.


62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돌팔매를 당하고 있다. 해방 전후, 그리고 전쟁과 가난을 이겨내고 경제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교회의 역할을 지대했다. 어두운 세상에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튼 장본인이기도 했다. 시대를 읽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는가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자본과 성장이 제일로 꼽히는 21세기, 교회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잃어가고 있고 ‘맘몬’이라는 신사에 참배하며 물질과 성장제일주의에 빠진 교회를 보고 시대의 지표를 읽을 사람은 더 이상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몇몇 소수 대형교회가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처럼 포장된 오늘날, 광복이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는 ‘순결한 기독교’를 되찾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민경배박사는 “3.1운동을 이끌 당시 한국교회는 불과 49만 명의 기독교인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용기, 미래를 향해 바르게 증언하고 날개 짓하는 다이나믹한 62년 전의 신앙심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경배박사의 말처럼 조국을 변화시키고 해방시키는 거대한 힘은 크기와 물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지키고 하나님의 소망을 전하는 근본적인 신앙의 양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해방 62주년에 한국교회가 다시 곱씹어 보아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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