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감리교 선교사, 한국교회 부흥 위해 4개월 동안 ‘정오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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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감리교 선교사, 한국교회 부흥 위해 4개월 동안 ‘정오기도회’
  • 송영락
  • 승인 2007.05.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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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함→길선주→김익두으로 이어지는 회개와 성령의 은혜가 충만

1906년 신년부흥회를 통해 부흥운동의 열기가 더욱 더 저변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1906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선교사 사경회, 목포부흥회, 그리고 장대현교회 준비기도회 등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네 가지 사건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하다. 첫째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평양선교사사경회이다. 남녀, 장로교, 감리교 할 것이 없이 평양지역에 있는 모든 남녀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일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다. 기도와 성경공부로 1주일을 보내는 동안 성경공부를 위해 택한 요한일서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하디는 평양지역 선교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그 후 어떻게 성령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진솔하게 간증했다.

 

장감 평양선교사 사경회

성령께서 그곳에 참석한 자들에게 승리하는 길은 “비통의 눈물과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뿐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았다.

 

그곳에 참석한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아다. 그 현장에 있었던 번하이젤선교사가 ‘원산의 하디 의사가 참석했고, 우리 모두 커다란 축복을 받았다’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사경회 참석자들은 큰 도전과 은혜를 경험했다.

 

1894년에 순교한 제임스 홀 선교사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과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셔우드 홀은 훗날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자신이 12살 때 어머니와 함께 하디의 집회에 참석 하였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제임스 홀이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왔던 사람이 하디였다. 이미 셔우드 홀의 아버지 제임스 홀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조선인들을 살리려다 1894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하디가 제임스 홀이 세운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서 와서 평양선교사들을 위해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다. 셔우드 홀은 하디의 설교에 받은 은혜를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의 설교는 응변 적이거나 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의 가슴을 열어 듣는 이들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맞닿게 직선적이고 성실하게 설교했다. 나는 그날의 설교에 감동했다.” 그런 후 그 때 들었던 하디의 설교를 이렇게 회상했다.

 

“인간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이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 질 것이다.”


닥터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 홀의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그때까지 셔우드 홀은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그날 예배 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셔우드 홀 역시 새해만 되면 언제나 새로운 설계를 세우곤 했지만 작심삼일로 끝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결심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홀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의 결심이 현실 곳에 실현될 수 있었는가 이렇게 증언했다.

“내 의지만으로는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할 게 자명했다. 그러나 닥터 하디의 설교에서 영적인 힘을 얻어, 마음이 열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새 결심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심감에 찼다. 닥터 하디는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1907년 그는 조선에 ‘대부흥’을 일으켰다. ‘은둔의 왕국’의 새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백인 소년도 있었다. 그가 바로 ‘나’였다.”

 

이렇게 해서 사업가가 되려고 했던 셔우드 홀은 하디의 집회 때 큰 은혜를 받고 명문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해주에 결핵 요양원을 설립했다. 그와 함께 입국한 펜실바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의 아내 역시 훌륭한 의료선교사였다. 이들 부부가 설립한 해주 결핵 요양원은 버림받은 한국의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최초의 결핵 요양원이었고, 수많은 폐결핵 환자들이 치료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 폐결핵 환자를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도 셔우드 홀이다.

 

많은 동료 선교사들을 감동시킨 1906년 8월 하디의 평양선교사사경회는 한국의 선교사들을 먼저 영적으로 무장시킨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예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있었다. 성령계서 어떻게 자기 마음에 임하셨는지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하는 하디의 간증과 설교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났다. 이 때 가장 큰 은혜를 받은 평양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는 자신이 은혜를 받은 요한일서를 가지고 장대현 교회 제직들을 모아놓고 자체 사경회를 열었다. 이들은 성령의 강한 임재 속에 자신의 죄악을 철저하게 통회하는 길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1907년 1월에 열릴 겨울사경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선교사 사경회와 존스톤

1906년 하반기에 있었던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은 서울선교사 사경회였다. 이 사경회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위원이자 유명한 부흥사이었던 존스턴이 주 강사를 맡았다. 평양선교사 사경회에 참석했던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모두 이 집회에 참석했다. 존스톤의 집회 기간에 북장로교 연례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존스톤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하며 한국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부흥을 사모하는 선교사들은 같은 선교지 인도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한국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부흥을 사모하던 선교사들은 같은 선교지 인도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욱 더 은혜를 사모했다. 바로 이것이 반하이젤이 자신의 일기에서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했다”고 말한 역사적인 선교사 사경회였다.

 

평양주재 한국의 선교사들은 존스톤으로부터 인도 부흥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들이 가졌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서울 사경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20여명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처럼 평양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축복이 임할 것을 믿고 정오기도회를 가진 것이다.

 

존스톤은 서울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후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인도했다. 이미 서울사경회 때 선교사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존스톤은 이날 장대현교회 교우들에게 웨일즈 부흥운동과 인도 카시아 지방 부흥소식을 들려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참석자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그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이날 존스톤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교회에 번져 부흥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음을 말하면서 조선에서 누가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처럼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겠느냐, 있으면 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회중은 잠잠하였고 응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 신학생이자 장로로서 장대현교회에서 봉사하는 조사인 길선주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손을 들고 일어섰다. 이것을 본 존스톤박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고, 길선주와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한 시간에 걸친 이 예배로 인하여 모든 청중들에게 은혜가 충만해졌고, 장대현교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내비치게 되었다.

 

서울선교사 사경회와 존스톤의 평양방문을 기점으로 평양지역 장감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계속 가졌다. 한 달 동안 기도회를 가진 후 한 남자 선교사가 한 달 동안 기도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며 각자 집에 돌아가 선교를 계속하면서 편리한 시간에 기도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계속 기도하기로 하고 좀더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기도시간을 정오에서 오후 4시로 변경하고 저녁식사 때까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그 후 4개월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길선주 장로는 존스톤의 집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황해도 재령에서 도사경회가 열렸을 때 길선주 장로가 그곳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재령지역에 큰 은혜가 임했다. 이때 김익두가 큰 은혜를 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이 먼저 은혜를 받게 하시고 존스톤을 통해서 장대현교회의 수석 장로인 길선주가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길선주의 뒤를 이을 김익두를 준비해두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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