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축복과 면죄부를 팔아 얻은 성장, 한계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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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축복과 면죄부를 팔아 얻은 성장, 한계에 이르다
  • 이현주
  • 승인 2007.02.15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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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3>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회개해야 하나
 


최근 일산의 한 교회는 장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내분이 일어났다. 교회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교회는 은퇴장로의 자리를 위해 3명의 장로를 세웠고 후보자는 각각 3천만 원의 헌금을 약정했다. 문제는 장로 후보자의 자질검증에 있었다. 평상시 주일 대예배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던 한 성도가 장로후보에 거론되자 성도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교회의 임명 강행에 급기야 성도들은 장로를 뽑는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제직 임명이 돈과 관련된 것은 한 두 교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퍼진 것이며 헌신과 봉사의 직책보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개 교회 장로들은 교단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권력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 교회가 직분을 매매하기에 이르렀을까. 성직자들이 먼저 돈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지도자의 타락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신학교육의 타락은 목회자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고 검증받지 못한 교회를 여기저기 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교회의 성장은 막대한 헌금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마이더스의 능력’을 목회자에게 주었고 스스로 풍성한 헌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 목회자를 찾기란 힘든 실정이다. 심지어 90년대 이후 교회건축 붐이 일면서 교회매매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돈, 명예 그리고 권력


최근 수평이동에 의한 교회부흥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는 “돈은 중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로 기록된 돈에 대해 이목사는 줄곧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지 돈이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해왔었다.

이동원목사는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탐욕은 현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이며 놀랄만한 것은 교회지도자의 의식 깊은 곳에도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형교회 목사의 발언은 항상 주목받지만 작은 교회 목사의 발언은 힘을 얻지 못하는 것, 이것 역시 물량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돈으로 비롯된 타락은 명예와 권력으로 이어진다. 명예를 얻기 위해 저지른 죄도 많다. 기독교역사학자 이만열교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귀족화되면서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가로챘다”고 질책했다.

수십 년간 진행되어 온 부활절연합예배를 예로 들어보자. 행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주최측은 대형교회에 의존하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소위 ‘연합’행사에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해 이름을 내건다. 서로 대회장과 설교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주최측은 내로라하는 인물을 모셔오기에 급급했다.


긍정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했다는 교단 분열 역시 교회지도자들의 명예를 위해 저질러진 사례가 비일비재 하다. 아직도 군소교단 중에는 ‘총회장’이라는 명예를 얻기 위해 ‘메뚜기’처럼 교단을 옮겨 다니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하나됨’을 반대하거나 분열을 조장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교회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의 분열과 갈등에도 교회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한다. 나아가 교회의 타락은 성도의 타락을 묵인하는 실수를 범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에 이어 교회 구성원인 성도들까지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값싼 복음은 면죄부인가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목사는 “예수 이름이면 무엇이나 통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값싼 복음이 남발되고 있다”고 교회의 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역사학자들 역시, 물량과 타협한 교회는 더 많은 성도를 끌어 모으기 위해 헌금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팔아왔다고 지적하길 주저치 않았다.


옥한흠목사는 “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값싼 설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간 큰 예배자를 양산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른다’는 표현은 오늘날 어게인 1907을 외치며 “회개합니다”라고 눈물을 쏟아내는 성도들에게 다시 들려주어야할 말이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함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지만 부흥은 오지 않는다. 진정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내 죄만은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성도들의 비뚤어진 신앙은 헌금으로 면죄부를 사고 헌금으로 축복을 받는 웃지못할 상황을 만들었다.


교회밖에서 누가 봐도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사람도 교회 안에만 들어서면 존경받은 성도가 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밖에서 숱한 죄를 지어도 교회 안에서는 새벽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며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는 교인이기 때문이다.


타종교의 성장 이유


교회의 타락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이미 통계를 통해 접했다. 안타깝게도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의 타락이 눈에 띠는 것은 한국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다. 바나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미국 기독교신자의 증가는 5%에 그쳤다. 한국교회보다는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종교 성장과 비교하면 충격적이다.
같은 기간 미국 내 힌두교는 273%, 불교 170%, 이슬람교는 109% 증가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쇠락은 세계적인 추세대.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의 교회 쇠퇴에도 그들은 문화와 전통으로 기독교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 기독교와 차별점이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인구 변화를 다시 살펴보자. 한국 통계는 가톨릭과 원불교의 성장이 압도적이다. 지난해 교회는 이 통계를 받아들고 ‘왜 가톨릭을 선호하는지’ 원인을 분석하기에 분분했다.

당시 연세대 석좌교수인 박영신교수는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성스러움을 잃었고 물질주의와 경제지상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천민 기독교’라는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성장일로를 걷는 가톨릭과 원불교는 어떤 특징을 지닐까. 종교간 대화에 오랫동안 참여해온 한신대 채수일교수는 “원불교의 성장에는 겸손한 종교적 특징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원불교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선교와 겸손하다는 점”이었다며 “사회봉사와 해외선교에 오랫동안 성과를 쌓아오면서도 떠벌이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가톨릭에 대해서 채교수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지닌 모습이 성장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인구의 감소가 진행되고 농촌이 해체되는 등 미래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의 쇠퇴는 더 가속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채교수는 “희망적이지 못하다”며 “세상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120년 역사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지금 배가 부르다. 연간 13조에 가까운 헌금이 들어오고,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이다. 수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과거 한국교회가 이겨내기 위해 투쟁하고 부딪혔던 암울한 억압은 찾아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장애물이 없으니 교회는 평안하다. 사실 더 이상 부흥하지 않아도 성장하지 않아도 교회는 별반 어려움이 없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미래도 없다는 점이다.

교회는 편안함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이외에 돈이 주는 평안, 권력이 주는 평안, 명예가 주는 평안을 버려야 한다. “회개해야만 산다”는 절박함이 있지만 교회는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가 성장하던 1970년대 가톨릭은 세 가지 정책을 수립했다. 첫째는 신도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청소년에 대한 교육훈련에 투자한 것이며 둘째는 교회 지도자인 사제들의 수준을 높이는 것, 셋째는 가톨릭의 대사회적인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복지활동과 사회정의실현에 앞장 서는 것 등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가톨릭은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가톨릭이 30년 전에 세운 이 세 가지 정책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쳐 나가야할 과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교회의 쇠퇴는 가속화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풍요에만 빠져 살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부흥을 불러올 것인가. 선택은 교회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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