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부흥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변화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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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부흥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변화시키는 것
  • 이현주
  • 승인 2007.02.08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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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우리는 다시 부흥을 말하는가

 

부흥의 파급은 사회 전반에 나타나...거짓과 불순종 판치는 교회부터 회개해야

 

 
[연중기획을 시작하며]
한국교회 선교 초기 교회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던 19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도래했다. 한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한 각성의 움직임은 평양 장대현교회를 뜨겁게 달구었고 교회사는 당시의 평양에 성령이 임했다고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회개로 시작된 부흥, 성령의 임재로 확산된 열기, 한국교회는 1907년의 부흥을 다시금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녹록치 못하다. 지난 10년간 불교와 가톨릭 등 대다수의 종교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만 14만 4천여 명이 감소하며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톨릭의 성장이 80%를 넘어선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가톨릭은 10년 내 기독교를 따라잡게 된다. 기독교의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발표된 이 통계를 두고 ‘교회의 위기’, ‘변화의 시점’이라는 위기감이 조성되면서 원인 찾기에 골몰한 한국교회는 ‘회개와 각성 그리고 변혁’이라는 말로 해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는 부흥을 염원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과연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인가.

부흥의 이유는 간단하다. ‘시온을 위하여’ 우리는 부흥해야만 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가슴속에 좀처럼 뜨거운 열정이 지펴지지 않는다. 연초부터 한국교회는 다양한 이벤트로 성도들의 가슴을 두드리지만 굳게 닫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부흥의 평양 대부흥 100주년의 해. 본지에서는 ‘부흥’을 열망하는 한국교회가 먼저 해결해야할 변혁과제를 모색하고 그 변혁을 토대로 부흥을 일궈나가는 교회의 미래를 제안하고자 한다.


왜 우리는 다시 부흥을 말하고 있나


1907년 평양대부흥이 절정에 달한 시점을 교회사는 1월14일과 15일로 기록하고 있다. 1월 14일 장대현교회에는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12일 선교사가 인도한 저녁집회에서 몇몇 형제들의 회개가 있었지만 뜨겁다고 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14일 집회에서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길선주장로. 친구의 재산을 사취한 길선주 장로의 죄의 고백은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회중들은 날이 밝도록 기도는 그칠줄 몰랐다. 공개적인 죄의 고백, 눈물 흐르는 기도, 하나님을 향한 통곡의 함성...

그날 한 선교사는 장대현교회 사경회 장면을 보고 ‘그분이 평양에 오셨다’고 표현했다. 인도와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보다 강한 역사,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경험보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었다는 것이 선교사의 증언이다.


뜨거운 열기는 전국으로 퍼졌다. 또 교단을 넘어 부흥사경회 열기가 일어났고 교회는 성장을 거듭했다.

교단별로 기록된 통계를 보자. 장로교는 1903년 1만9,327명에서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에는 5만6,943명의 성도로 성장했다. 이 부흥의 열기는 계속 이어져 1911년 14만470명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1906년 북감리교의 통계에 따르면 등록교인 1만8,107명에서 1년 뒤 대부흥기인 1907년에는 3만9,613명으로 200% 성장을 보였다. 놀라운 부흥의 속도였다.

그러나 1907년의 부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은 교회 내의 부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변화를 가져온 ‘영향력 있는 부흥’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7일부터 시작된 ‘트랜스포메이션 2007’ 행사에 참석한 다윗의 장막 스캇브래너목사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수단을 통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또 교회 건물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력을 미칠 때 그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술과 도박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생활개혁을 일으켰던 1907년의 부흥. 그것은 단순한 교회부흥 그 이상이었다. 민족사적으로 암울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준 사건이었으며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사건이 됐다.

그리고 100년이 지났다. 20만 명에 불과했던 100년 전 교세는 8백61만여 명으로 40배 증가했다. 그런데 교회는 얼굴을 들지 못한다. ‘겨우 8백만 명이라니..’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1200만이라고 교세를 부풀리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통계청의 조사로 가감없이 드러난 벌거벗은 현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이다.


4백만 명이나 부풀려진 성도수는 한국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과시주의, 숫자로 승부하는 성장주의, 대형교회 성장비결인 수평이동, 물질만능에 사로잡힌 교회라는 비난을 피해가기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로 부흥하길 게을리 했다. 그저 게으름을 가리기 위해 교회안팎으로 숫자를 부풀리며 “교회는 이렇다. 이만큼 컸다. 이만큼 영향력이 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부흥메신저로 불리는 영국의 전도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기독교가 상업주의에 물들면서 침체의 늪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교회와 싸구려 복음, 게으른 사역자가 판치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교회가 타락한 상황에서 그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도덕적 기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가소로운 일이라고 힐난했다.


2007년 한국교회는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신년 초부터 잠실체조경기장을 가득 채우며 대형집회를 개최하고 목회자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하고 밤새워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지만 그 이후 어디에도 뜨거운 각성과 부흥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과시적인 행사, 그것은 이벤트에 불과했다.

당시 기도행사에 참가했던 한 작은 교회 목회자 사모는 “앞서 회개와 부흥을 기원하던 이름난 목사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했다. 평범한 한 사람에게 맡겨진 기도에서 ‘작은 자’는 ‘큰 자’들의 형식적인 기도와 참여를 꼬집은 것이다.

대각성 행사를 함께 기획하고 참여의 의지를 밝혔던 수많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순서를 마친 뒤 사라져 버린 것이다. 24시간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리에 그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성도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 마지막 순서를 맡은 교회의 청년들과 ‘작은 자’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말만 앞서고 행동은 없다. 자리는 만들어 놓고 그뿐이다. 자신의 이름을 거는 것으로 만족스럽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교회로 이미 오래전에 전락해버렸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됐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양대부흥 100주년 행사들을 지켜본 한국교회언론회는 "외형적인 회개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어서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라며 외형적인 집회를 통해 부흥을 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논평했다. 이벤트로 부흥을 꾀하는 얄팍한 한국교회를 꼬집은 것이다.


왜 우리는 다시 부흥을 논해야 하는가. 부흥의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놓이게 하는 것,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부흥밖에 없다.

한 가지 지금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전도와 부흥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도의 사명이 중요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겐 부흥이 더 시급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전도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알고도 죄와 타락을 거듭한 그리스도인에겐 부흥이 필요하다.


OMF선교사였던 알반 더글라스는 “부흥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출발이다. 중요한 것은 부흥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크게 느끼게 한다”고 정의했다.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변화’.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타락한 그리스도인이 가득 찬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이요, 소금’이 될 수 없다.


알반 더글라스는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흥은 형제애가 메말랐을 때 필요하다. 불화, 시기, 다툼, 사악한 말들은 부흥이 필요하다는 확실한 표시”라고. 거짓과 불순종이 판치는 세상, 우리는 부흥해야 한다. 교회를 확장하는 부흥이 아닌 스스로를 하나님께로 정결히 되돌리는 부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신앙이 회복되는 ‘정결한 부흥’을 원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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