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는 사람 비위 맞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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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는 사람 비위 맞춘 결과"
  • 윤영호
  • 승인 2006.02.24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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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복음으로 돌아가라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 영향력 끼칠 생각말고 복음으로 돌아가라

본지 창간18주년을 기념한 특집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시리즈는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을 등식관계로 놓은 한국교회의 주객전도 실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교회의 주된 사명이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살리기, 즉 세속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청산하고 거룩한 가치관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도 이 사명이 교회성장으로 대치됐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주객전도 현상은 매우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약해서는 폭발력 있는 전도 역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주객전도의 첫 출발이었다. 물론 맞는 생각이다.

건강한 몸이어야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 생각의 가장 큰 두 가지 약점은 복음을 왕성하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성장한 교회’에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었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조직체’로 생각하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한국교회가 이같은 두 약점을 도리어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재확인하며 그 근거들, 이를테면 목회경영이라는 신 개념도입과 시스템 목회를 통한 철저한 합리주의 목회현상들을 집어보았다.

끊이지 않는 성장집착 "기독교 양극화 심화 현상"
이 가운데 나타난 사례로 미국의 맥도날드식 교회(맥처치)와 기업경영 방식인 교회 컨설팅 및 마케팅 전략을 살펴보면서 성장을 향한 우리들의 집념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알아보았다.

더더욱 문제인 것은 합리적 경영과 시스템 목회에 의한 ‘안정성장’이 결국 사회정치적으로 교회를 얼마나 타락시키고 있는지 21세기에 들어 한국교회의 타락현상이 점차 그 농도를 짙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교회에서도 발견되는 사실로, 교회가 이제 명실공이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한 정치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게 됐으며 정치인들도 기독교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정치권력에 가까우면 타락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
교회가 정치적 입지를 굳히거나 혹은 정치권력화 하는 것이 왜 타락일까. 여러 가지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는 마틴 루터를 왜 종교개혁의 지도자라고 지금까지 추앙하고 있으며 이를 계승한 존 칼빈의 신학사상을 개혁주의 신앙으로 품는지 생각하면 될 일이다.

교회의 정치 권력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던 중세시대의 교회는 흔히 기독교 안에서 조차 ‘타락’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 사회학문 속에서도 ‘암흑기’로 묘사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교회가 권력을 쥐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그룹을 만들어 세상말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강력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고작 그가 한 일이란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것뿐이었고 예수님과 구원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개혁은 교회 내부의 문제 "왜 사회개혁을 말하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에게는 화려한 정치적인 수식어와 호감을 갖는 말투, 표정과 제스쳐는 위선이었으며 ‘말씀으로 복귀’하는 것만이 유일의 길이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성장을 말할 때가 아니다. 안정목회를 보장하는 수입목회프로그램을 공부하느라 이리저리 세미나를 기웃거릴 때도 아니다.

미자립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헉헉대며 복음이 아니라 한 푼의 돈 때문에 고통당하는 도시언저리의 미자립교회나 젊은 사람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농어촌교회의 존재는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교회를 짊어진 사역자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이다. 성장이 목적이 된 우리시대의 목회풍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개혁’일 것이다.

얼마 전 교회성장과 갱신을 주제로 옥한흠목사와 가진 대화 가운데 한 대목이다.

“사실 교회가 성장됐다는 사실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개혁의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장이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고 보면, 이제는 성장한 교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때입니다. 성장한 교회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람들의 구미를 맞춘 교회여서 비위를 상하지 않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봅니다. 설교에는 비판보다는 축복이 있고 하나님의 회개보다는 평안을 강조하곤 하는 경향이 큽니다. 사람의 생각에 가장 잘 맞춘 교회, 그것이 대형교회라는 겁니다.”

대형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목사가 이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줄은 사실 몰랐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일면 맞는 말이다. 옥목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제자화훈련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세상에 따라가는 맞춤형교회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성장한 교회는 곧 성도들의 구미를 충족시킨 증거라는 게 옥목사의 생각이었다.

사도행전19장이 지적한 우상경제 실상과 개혁방법
우리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되 그 변화유형의 한 측면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사도행전 19장23절 이하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경험이다. 이 지역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에베소지역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우상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복음은 우상신전을 만들어 판매하는 공장직원들과 유통업자들, 도소매상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불만은 감정을 넘어 생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집에 우상신전을 만들어 숭배하던 사람들의 수가 갈수록 적어지면서 지역경제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을 대표하던 데메드리오는 우상경제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당국에 제소하는 등 대규모 농성에 돌입했다는 얘기다.

이야기를 중세 루터시대로 옮겨보자. 루터가 지적한 면죄부 판매로부터 각종 교회세금에 대한 논박은 중세교회의 재정구조를 그 근본부터 흔들게 했던 치명적인 폭로 그 이상이었다.

교회개혁된 이후 나타난 사회개혁의 현상들
중세교회의 이같은 타락한 재정구조에 관련된 자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관계없이 이제는 자신의 ‘불의한 경제이득 구조유지’를 위해 루터와 싸워야 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상납먹이사슬의 고리가 약해지면서 이들은 개혁파의 활동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순수한 신앙으로의 복귀가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헛수고일 뿐 오직 은혜를 회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루터개혁의 주요 타깃은 중세교회의 개혁이 아니었고 ‘은혜의 회복’ ‘말씀으로의 복귀’였다. 중세교회의 불의한 구조개혁은 말씀복귀가 만들어낸 자연스런 열매였던 것이다.

루터개혁은 중세교회 뿐 만 아니라 중세사회 여러 분야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윤을 위한 노동은 비윤리적이다’라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중세교회의 경제개념은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로 바뀌어 이른바 이윤을 창출하는 근대적 노동개념을 지지하게 했다.

이는 상업을 천시했던 당시의 경향을 바꾸어 활발한 무역거래를 허용하도록 했으며 이에 따라 인구감소의 우울한 경향까지 ‘인구증가’로 바꿔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직업을 보는 눈도 바꿔 버렸다. 소위 성직과 세속직을 구별하던 중세교회의 가치관은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질 때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해석돼 직업소명설이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소위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루터의 개혁을 그마나 잘 투영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인간을 바라보는 눈도 바꿔 버렸다. 국가권력에 대한 절대권이 개인으로 귀속되는 일이 나타난 것이다. 개인의 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므로 국가권력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지배자의 신적 권위는 더 이상 독재적인 지배의 헌장이 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며 성공을 추구할 때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개혁주의의 핵심은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개혁이 먼저라고? 그럼 교회는 사회단체인가?
만약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교회의 제도와 세상의 각종 제도들, 정치시스템, 경제관련 법과 세무조세 관련 사항들을 전문가 그 이상으로 공부하며 방안들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지만 그같은 견해를 주장했던 많은 시도들이 실패로 끝났던 것을 알고 있다.

루터와 개혁주의자들은 제도개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노력에 집중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할 결과, 불의한 경제구조와 정치시스템, 문화구조를 누렸던 많은 기득권자들은 소동을 일으키며 혼란에 빠져버렸다. 기독교는 평안을 주기보다 반하나님 체제를 숭배하던 많은 사람들을 혼란과 소동 가운데 몰아넣은 것이다.

70~80년대에는 핵무기만이 유일한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90년대에는 이익을 나눠가질 동맹국간의 강력한 연대의식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며 소위 ‘블럭경제’를 칭송했었다.

그러던 그들이 지금은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교회는 철저하게 계산된 21세기 세상의 강력한 기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교회와 복음 사이의 괴리는 어느 정도나 벌어져 있는 것일까. 세상과 타협한 불의한 종교시스템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일까. 말씀복귀를 소망하는 많은 교회들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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