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특집]세상을 따라가는 교회 ;권력의 힘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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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8주특집]세상을 따라가는 교회 ;권력의 힘을 맛보다
  • 윤영호
  • 승인 2006.02.16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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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전쟁은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신앙적으로 정당화 하곤 한다.


 

권력에 길들여져 세속기관으로 추락 위기

최근 기이한 일이 정치권에서 일어났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가 준비되고 있을 때 일어났던 현상이다.

여당 소속의 한 의원이 대통령에 의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자 야당의 한 의원이 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과거행적, 즉 기독교폄하 발언을 문제 삼을 작정이었다.

야당의원의 이같은 준비작업은 언론을 통해 미리 세간에 알려진 상태였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이 야당의원은, 하지만 또 다른 안건이 불거지면서 청문회가 격앙되자 기독교폄하발언에 대한 추궁은 결국 하지 못했다.

최근 벌어진 이 문제에 대한 교계의 반응은 다양했다.

“기독교를 업신여긴 사람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한 비뚤어진 생각을 제대로 잡는 계기가 돼야 한다.”
“어떤 정치인이든 기독교를 등지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알게 해야 한다.”
“우리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자정 못하니까 정치인의 비판이 있는 것 아니냐?”는 등등 긍,부정 반응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두 가지 부분이 있다. 하나는, 기독교 관련 사안이 정치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정치쟁점화 되고 있음에도 교회의 반응이 전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치와 교회는 하지만, 대립관계는 아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신학자 존 스토트박사는 저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IVP출간)에서 기독인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정치와 안보에서의 역할을 제시했었다.


정치 안으로 발을 옮기는 교회

정치인들이 기독교를 쟁점화 하는 것 그 자체는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사명완수를 위해서는 종교는 물론 여러 범주의 사안들을 쟁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열망하는 영적인 집단으로서 세속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한 가치관을 따라 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가 정치안건에 결탁하는 것이라든지 그 안건을 우리의 주된 소명에 앞세우는 태도는 분명 구별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최근 청문회 때 나타난 기독교관련 안건은, 따라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공직자의 과거시각을 꼬투리 삼아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야당 정치인의 비기독교적인 가치관 때문에 적어도 그 당사자인 한국교회는 정치쟁점화 된 그 안건에 대해 우려했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교회의 정치세력화 경향은 미국교회의 경우 이미 최고수준에 이르러 일각으로부터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나 미국교회협의회(NCCUSA)는 이 부분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 기독교단체이다.

이미 공개된 구소련 정보기관인 KGB의 문건에 따르면, WCC방침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첨가하도록 공작을 펴왔다는 사실이 찰스 콜슨 전 미국 닉슨대통령 보좌관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지난 92년 미첼 로우 박사가 쓴 가톨릭 보고서 ‘성직자들 속의 스파이’를 인용, 이 부분에 대해 “교회의 사회주의에 대한 영향력을 마비시키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미국NCC도 지난 90년 니카라과 선거에서 산디니스타정당을 지지하며 자신의 정치권 진입사실을 확연히 드러냈다. 이 정당은 자신을 반대하던 교회를 탄압했던 다니엘 오르테가가 진두지휘했던 곳이어서 보수권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도 이들은 각종 매체에 출연해서 전쟁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반전론자와 둘러싸여 백악관을 행진했다.

정치안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결코 진보권만이 아니다. 보수권도 정치권 합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정책결정자들과 매우 자주 의견을 교환했다. 공화당 소속이었던 레이건 대통령시절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에 흡수된 목회자와 교회들은 정치 안건에 미치는 교회의 영향력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미국 교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유감스러워했다. 

정치적 논의에 합류해 왔던 이들 보수권 교회지도자들은 지난 90년대 초 대통령이 법률안에 서명하기 위해 동성애 합법주창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했을 때 그 어떤 반대성명서도 발표하지 못했다.

정치인들과 함께 각 사안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혹은 잦은 회의로 형성된 인간관계 때문에 이들의 정책결정을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고 권력기관의 초청을 받으며 환대를 누렸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치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는 지난해 초 미국의 유력 잡지 타임지가 발표한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미국복음주의 지도자들’보며 부러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정치에 영향을 끼친 이들의 ‘큰 힘’을 일반 언론도 인정한다는 식의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진보권이나 보수권의 교회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정치권에 접근하는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좋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나 도덕주의자를 선출하여 부패하는 나라를 개혁하자”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각종 정치적인 안건이 우리의 허약한 영적인 초점을 더욱 흐리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생각임에 틀림없는 판단이다.


정치와 뒤범벅된 기독교 영성

오래전 우리나라 복음주의 학생운동권에서 한창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다. 복음주의에서 대통령후보를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까지 목사신분을 갖고 선거에 나서는 것은 바로 이같은 논쟁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유권자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최근 몇 년 사이의 기독교행보도 교회를 훼손할만한 요인이 다분하다.


후보자 낙선운동과 함께 특정후보자에 대한 지지운동 등 교회는 유권자운동을 통해 후보자들이 낸 지극히 정치적인 수사가 붙은 공약사항과 그 속을 알 수 없는 신앙심을 잣대로 정치개입을 당연하게 밝히고 있다. 현란한 정치의식을 가져야만 더욱 영성이 빛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요즘 한국교회의 풍토는 국가(정부)와 반드시 독립해야 하는 교회의 위치마저 위협하고 있다.

정치쟁점화 되는 기독교 이슈들이 왜 문제인지는 그것을 법제화 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로비’와 대정치권 ‘압력’ 등이 말해준다.

정치를 통해 교회가 처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라든지 혹은 복음전도에 더욱 유리한 환경을 보장받으려는 시도들은 교회의 정체성과 기독교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는 최근 격변의 상황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유신독재와 군부철권 통치 시절, 기독교 진보권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시위와 인권선교를 전개했다. 당시 기독교 보수권은 정교분리(政敎分離)원칙을 주장하며 지상권세에 복종하라는 성경을 인용, 대형집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 진보권은 더 이상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를 촉구하는 대정부 성명서도 더 이상 발표하지 않는다. 현 통치권자가 하나님의 사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나 정교분리를 앞세웠던 보수권은 지난 3년 동안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만 10여 차례나 집회를 열어 정부의 엇나간 정책을 비판해댔다. 지난 30년 동안 바뀐 것은 권력을 잡은 정치집단인데도 한국교회는 정치집단에 따라 그 모습을 똑같이 바꾼데 이어 이제는 정치좌담회에서 정치이슈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생각해 보자. 교회가 주장한 정치관련 발언들이 특정정치권과 자유로웠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말이다. 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층 진전된 정치이슈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정치단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교회경향은 정치적인 이슈를 따라다니는 추세가 압도적이어서 교회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다.

정치권력의 맛을 들인 교회는 초대교회가 뿜어냈던 복음의 역동성과 정치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는 대신 ‘권력자들의 계산’과 ‘힘의 역학관계’을 신뢰하도록 이끈다. 

인간은 죄인이어서 무엇을 하든 죄의 성향을 띠며 행동하고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이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강조해야 한다. 정치는 바로 인간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죄관(罪觀) 때문에 교회와 구별돼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본(神本)이 아닌 인본(人本)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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