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1907] 성령체험한 성도 사회정화·순수신앙운동 결실 맺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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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07] 성령체험한 성도 사회정화·순수신앙운동 결실 맺어
  • 김찬현
  • 승인 2006.01.19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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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운동 청사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오는 2007년은 한국교회 부흥의 모판이었던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이 시작된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아직 2007년이 채 되기도 전임에도 벌써부터 한국교회 안밖에서는 그동안 성장정체기를 지나 이제는 침체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한번 성장세로 돌아설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고 부산을 떠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많은 교단과 단체들이 앞다투어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기획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있고 평양대부흥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한해 한국교회 대표적 지도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회개’와 ‘각성’이었다.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바로 ‘회개’였다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최근 한국교회의 이런 움직임이 과연 부흥에 대한 올바른 시각으로 평양대각성운동에 접근하고 있느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또 부흥이 아무런 역사적 뿌리가 없는 상태로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추구된다면 한국교회가 얻게될 유익보다 잃게되는 손실이 더 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을 개선시키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양대각성운동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학자들의 원론적인 지적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 더 이상 성장하지않으면 위기라는 잘못된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을 벗어나야한다는 강한 비판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반드시 주목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앞선 이런 지적처럼 문제는 한국교회가 평양대각성운동을 통해 부흥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단순히 부흥의 현상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세대학교 서정민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평양대각성운동이 순수 신앙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서교수는 “평양대각성운동이 한국교회에 질적인 성장은 물론 양적인 큰 성장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부흥을 목적으로한 신앙 운동이 아니라 당시 성령체험을 통한 성도들의 죄책고백과 회개가 가져다준 것”이라고 지적하며 “부흥을 목적으로 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적인 회개와 갱신에 앞장선 운동이었다”고 평양대각성운동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서교수의 말은 부흥이 반드시 양적인 성장과 함께 동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물론 부흥운동은 양적인 성장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부흥운동의 목적이 양적인 성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총신대학교 박용규교수 역시 이런 점에 동의하고 있다. 박교수는 “기독교역사 속에서 참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마다 놀라운 사회적인 변화와 교회의 성장이 동반됐다”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후에야 하나님은 반드시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숫자의 증가가 아닌 질적인 성장이 필요

그렇다면 부흥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과연 무엇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흥을 이토록 바라는 것인지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솔로몬 스토다드목사는 “부흥은 하나님이 비상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믿음과 신앙을 소생시키시는 어떤 특별한 계절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대체로 한국교회는 부흥에 대한 왜곡된 정의를 갖고 있다. 부흥을 단순히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건전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부흥을 단지 숫자의 증가로 정의하지 않았다.

물론, 부흥이 숫적 부흥을 배제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숫적 부흥은 질적 부흥에 대하여 수반되는 것이지 질적 부흥을 전제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교회에 부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숫자의 부흥이 아닌 질적인 성장을 동반한 부흥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흥의 시기는 가장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 피어났다.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상황을 조명해보면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고종황제 퇴위 등 우리 민족은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부흥이 일어났던 당시 상황 속에서 전체인구의 단 2%도 되지않는 숫자만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영적가치의 혼돈과 도덕적 불감증 등이 횡행하던 시기였다.

평양대각성운동이 일어난지 거의 100년에 접어든 현재의 상황도 그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체인구의 2%도 되지않던 기독교인의 숫자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25%라는 놀라운 교세를 가지고 있고, 엄청난 교회의 숫자를 자랑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사회지도층이 크리스천이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당당히 주류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양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적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분명 부흥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부흥이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인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뭔가 요란하고 교세의 확장을 외치는 100주년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 100년 전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기억하며 한국교회의 회복을 꿈꿔야한다.

분명 100년전 이땅을 흔들었던 부흥의 역사는 회개로부터 시작됐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시금 100년전의 부흥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한국교회의 회개가 그 시작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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