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1907] 교파분열로 ‘성장과 갈등’ 두 갈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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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07] 교파분열로 ‘성장과 갈등’ 두 갈래 길
  • 김찬현
  • 승인 2006.01.1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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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던 한국교회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기게 된다. 일제는 합방직후 한국인의 성향을 네가지로 분류하는데 한국통치에 가장 위험스러운 계층이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일제에게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을 탄압할 필요성이 있었다.

‘데라우찌총독모살미수사건’이라고 명명된 ‘105인 사건’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105인 사건’에 연류된 대부분의 인사들은 기독교인이었다. 특히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자리잡은 서북지방의 목회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은 기독교와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의 성격이 짙었다.


한일합방이후 민족의 교회로 거듭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평양대각성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생적인 교회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과 그동안 보잘 것 없던 한국교회가 이 자생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민족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105인 사건’ 이후 이어진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연세대학교 서정민교수는 “3.1운동으로 전국에서 일어났던 만세시위 중 200여 곳이 교회나 기독학교를 통해 전개됐다. 당시 모든 것이 일제치하에 억압되었던 상황 속에서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조직은 교회 밖에 없었고 한국교회는 이런 필요를 매우 잘 감당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3.1운동의 실패이후 기독교인수가 일시적으로 줄어들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1940년대 신사참배의 위기 속에서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사람들은 평양대각성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후 일시적인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1919년 당시 전국민 중 많게는 1.9~2.5%정도로 알려진 기독교인들 중 다수가 일제에 의해 감옥에 투옥되고 제암리사건 등과 같이 교회에 대한 악랄한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목회자가 투옥되어 감옥에 들어가지않고서는 노회조차 못한다는 증언이 있다는 사실도 일제의 교회를 향한 핍박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3.1운동’의 실패와 민족을 대표해 그 고통을 감내한 한국교회는 1920년 이후부터는 다시 부흥운동에 들어선다. 개인구원과 내세주의로 다시 들어선 것이다. 당시 부흥사로 유명세를 떨쳤던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 등이 이런 한국교회의 성격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한국교회가 처한 역사에 대한 몰역사성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급진적성격의 ‘3.1운동’의 실패를 겪으면서 점진적인 민족운동으로 한국교회가 선회했다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많은 역사전문가들은 말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

1945년 8월 15일. 36년간 계속된 억압의 시대는 일제의 몰락으로 끝이 났다. 이것은 일제통치하에서 가장 탄압을 받았던 한국교회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을 통해 이어왔던 한국교회의 역사성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이후 민족분단의 아픔 속에서 남쪽의 교회는 반공을 이유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채 교파분열과 중소교단 난립 등의 혼란이 빚어졌고, 북쪽의 교회는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쇠퇴했다.


또 1950년 한국전쟁 속에서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부흥사로 널리 알려진 김익두목사를 비롯해 구세군의 노영수, 감리교의 송정근, 장로교 박경구, 정일선 목사등이 순교했으며 남궁 혁, 양주삼 등 목사와 신학자들이 피납되었다. 또 한국전쟁을 통해 파손된 교회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 84교회, 성결교 27교회 등이었으며 전쟁을 통해 한국교회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 아픔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제자리 지키기에 노력했다. 1.4후퇴 이후 부산에서는 거국적인 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개신교 연합체인 ‘기독교연합회 전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미국대통령과 유엔에 호소문을 보내는 등의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민족의 분열을 보여준 시기에 한국교회도 분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1년 고신의 분립을 시작으로 1953년 기장, 1959년 장로교의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일어났다. 이 사실은 해방후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분을 점차 잃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 교회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회참여와 부흥운동의 전개

1960년대와 7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가 세워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경제개발을 통해 공업화가 급속도로 추진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교회 역시 보수적 전통교회와 진보적 사회참여교회로 양분되었고 70년대 들어서는 각각의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며 교회부흥을 이끌어냈다.


많은 교회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의 폭발적 교회성장의 이유를 ‘복음주의적 성령운동’과 ‘적극적인 사회참여’ 두 가지 측면으로 보고 있다. 교회부흥의 한축을 감당한 진보권은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박정희대통령의 군정과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노력을 계속함으로써 비록 작은 숫자였지만 시대의 양심세력으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했다. 반면 보수권은 사회참여보다는 교회의 양적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한 시기였다. 대규모 집회들이 이 시기에 집중된 것이 이것을 잘 설명해준다.


1973년 미국의 부흥사 빌리그래함목사가 내한해 여의도광장에서 51만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형 집회를 연 것을 비롯해 이듬해에는 한국대학생선교회의 주최로 엑스플로대성회가 열렸다.


여의도광장의 부흥집회를 인도했던 빌리그래함목사가 “한국의 집회는 2천년 기독교역사상 가장 큰 역사적 전도와 감동을 일으켰다”라고 말할만큼 세계기독교역사에 큰 획을 긋는 행사였다. 이 두 대회는 한국과 한국교회에 전도훈련을 통한 전도의 불씨를 심는 계기가 됐으며 70년대 한국교회의 엄청난 양적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부흥의 물결은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과는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서정민교수는 “평양대각성운동은 회개와 각성을 중심으로 개인의 신앙의 성숙을 발판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면 70년대와 80년대로 이어진 한국교회의 부흥은 전도와 교회대형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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