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1907] 암울한 역사 속에서 피어난 `성령의 불길`
상태바
[Again 1907] 암울한 역사 속에서 피어난 `성령의 불길`
  • 김찬현
  • 승인 2006.01.04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 통곡과 자복의 소리로 기득찬 장대현교회 예배당



 

1907년 1월 12일, 이른 저녁 평양의 거리엔 어둠이 짙게 깔렸다. 평소 같으면 인적이 드물었을 저녁시간. 하지만 평양 장대현교회 주변에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장대현교회의 겨울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인원은 1천5백명.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에 이미 여자 성도들에게는 사창골교회와 산정현교회, 남문밖교회, 서문밖교회 등 4개 교회에서 따로 모이라는 전갈이 건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대현교회 예배당 안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조차 없었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뜨거운 입김을 뿜으면서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예배가 시작되고 방위량(Rev. W.N. Blair)선교사의 설교가 시작되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사람들의 눈빛은 밝게 빛났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의 말씀으로 교인들끼리 싸우고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면 안된다고 말하며 사고로 잘려나간 자신의 손가락을 내보이는 방위량선교사의 설교가 이어지자 예배당 곳곳에서는 이내 깊은 탄식과 울음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동의 설교가 끝나고 그 자리에 모인 1천5백여명의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울부짖고 뜨겁게 기도했다.


통곡과 자복의 소리로 가득찬 예배당


이튿날 주일낮 장대현교회에서는 길선주목사의 설교가 이어졌다. 길목사는 사람이 짓는 죄가 얼마나 자신을 옥죄이고 있는지 큰 몸짓으로 설명했다. 온 몸으로 말씀을 전하는 그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충만한 얼굴이었다. 앉은 채 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맞닥뜨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설교를 듣던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나갔다가 더 근심어린 얼굴로 예배당에 돌아와 ‘오! 하나님 내가 어찌해야 됩니까’라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14일과 15일로 이어진 사경회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밤늦게 이어진 사경회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600명이 남아 기도를 이어갔다. 이들의 기도 소리는 마치 하늘의 소리처럼 아름답고 크게 들렸고 하늘보좌를 움직일 것처럼 감동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통성기도 소리는 어느새 통곡으로 변해갔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던 중 벌떡 일어나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울부짖었고, 주저앉을 힘도 없어 온몸을 바닥에 내동댕이 친 채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를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기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던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왜 1907년을 말하는가


2007년 한국교회는 대부흥 100주년 또는 성령운동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말한다.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놀라운 성장을 일으킨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꼭 백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 내에서 ‘Again 1907’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서 ‘Again 1907’이라는 구호는 1907년 성령의 역사로 일어났던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억하고 성장 정체기에 들어선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부흥의 역사를 꿈꾸기를 바라는 한국교회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국권 침탈의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무렵의 조선은 안으로는 19세기 말 대원군과 수구파의 쇄국정책과 개혁파의 개혁이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가지려는 서구 열강들과 중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침략 세력들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우리의 오랜 역사동안 종속 관계를 맺어왔던 청국과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화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 그리고 부동항을 찾아 남하에 남하를 거듭해 온 러시아 제국주의 등 한반도의 평화와 주권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에 대항하기에는 당시 조선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1894년과 1904년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군대가 한반도에서 각각 두 번의 전쟁을 치루는 동안 번번히 고통받고 눈물을 흘린 이들은 바로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당시 평양과 서북지역은 서울의 중앙정부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홀대를 받아온 지역이었다. 때문에 평양과 서북지역의 사람들은 중앙정부와 상류 계층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거부감은 곧 바깥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해줬다. 그리고 외부 문명에 대한 관심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 즉 기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한국교회는 부흥의 역사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한국교회 ‘자생력’을 갖다


초기 기독교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민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민족에게 수용되었고 선교사들도 그들의 신앙 노선과 상관없이 민족 문제에 간여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민족적 아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1900년대를 전후로 일어난 청일·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1905년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군대 해산과 고종의 퇴위라는 격랑의 세월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민족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바람은 점차 커져갔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경제적인 피난처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민족적 성향으로부터 전환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05년부터 1906년 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사경회와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민족적인 색채로부터 탈피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본격적인 대각성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1907년 이전의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내세 중심적인 신앙운동이었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 토착 목회자와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평양대각성운동의 중심에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길선주목사가 있었다.


이 부흥운동은 평양은 물론 수년에 걸쳐 전국으로 퍼졌고 많은 한국인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기독교를 30년 만에 다시 되돌려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1907년을 한국교회가 자생력을 갖기 시작한 시기로 보고 있다. 또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사경회라는 토착적이고도 독특한 신앙적 특징이 확립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운동 ’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