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주 종교개혁](하)사람이 바뀌어야 제도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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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주 종교개혁](하)사람이 바뀌어야 제도가 산다
  • 윤영호
  • 승인 2005.11.03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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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에 무너지는 은혜체험을 세우라

최근 나타나는 한국교회 개혁방향은 적어도 사회적 잣대로 보면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제도를 바꾸면 사람도 변한다”는 소위 유물론적 인본사상의 기초가 이른바 ‘건강한 교회 회복’이라는 슬로건을 타고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제도가 악해서 사회가 부패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일관된 주장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건강성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영육의 총체를 지칭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 기독교 핵심 주장이다.



여론에 휘말리는 개혁운동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논제를 488주년을 맞은 종교개혁 주일을 전후해서 재고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이 논제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볍게 여기는 현상이 비일비재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치 대기업의 경영진을 문책하는 주주총회 분위기랄까, 혹은 대기업의 비윤리적 행태를 꼬집는 시민단체의 여론운동이랄까, 한국교회가 당면한 최근 2-3년 사이 문제는, 좁게는 교회소유에 대한 이기적 집착과 함께 넓게는 제도개혁이라는 유물론적 패러다임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왜 이같은 현상이 벌어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처럼 간단하다.

“제도개혁은 강제와 압력을 동반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힘(권력)이 있어야 한다. 현대시대의 힘은 여론이다. 여론을 형성하면 힘은 모아지게 돼 있다. 따라서 제도개혁은 여론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론은 조작이 가능하다.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영향에 민감한 약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여론을 전제한 최근 한국교회의 개혁추세는 다분히 조작적이고 권력 집중적이며 목적지향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왜 기독교적으로 문제인가 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이성(理性)이 개혁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조작가능성과 인위적 판단에 노출된 여론의 움직임을 통한 교회개혁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개혁청사진을 선호하는 현대여론의 특성만을 살렸다는 점에서 성령의 역동성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에 소위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짙다. 여론은 부정적 측면으로 인기영합을 함축하는 ‘포퓰리즘’을 확산시킨다.


이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여기서 논쟁할 부분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판가름 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은혜 축소한 펠라기우스식 여론

기원 후 5세기 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기나긴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가운데 교회는 어느 쪽을 신뢰할 것인지 촉구했다.

잘 아는 대로 펠라기우스논쟁으로 남아있는 이 과정을 통해 보수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부패의 원흉인 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 어거스틴의 주장을 따르게 됐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어거스틴의 주장에 반대한 펠라기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유롭다. 어떤 숨겨진 세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도 않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는다. 우리가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 죄 짓는 것을 멈출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계명과 예수그리스도의 모범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의 결심에 달린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떤 불완전함이 있어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을 잘못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에 어떤 흠이 있다는 주장은 인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모욕적인 언사가 된다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었다.


펠라기우스의 반론을 접한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천칭비유를 들어 인간의 자유의지(본성)는 늘 악한 쪽으로만 기울어지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하나님 은혜사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진흙에 빠진 자동차를 상상하라고 한다. 진흙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 더 빠져드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악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할수록 더 악해진다는 것이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 “너는 자유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자유할 수 없는 이치라는 것이다. 누군가 옥문을 열어주어야 죄수가 자유를 누리듯 진흙에 빠진 자동차 역시 다른 큰 지게차나 트레일러가 빼내주어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인간도 이와 똑같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악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가운데 구원 얻을 신분으로 격상되는 것이며 하지만 여전히 죄성은 남아있어서 견인과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거스틴과 루터 그리고 칼빈으로 이어지는 보수개혁주의의 핵심요체인 것이다.



제도가 아니라 은혜가 바꾼다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기독교는 성장침체 때문에 고심한다. 교회의 성장침체가 대사회 영향력 감소로 이어지며 결국 힘이 소진된 교회는 해를 거듭하며 갈등과 분열의 늪을 이기기 못하고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현실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안목으로 생각할 때 최근의 현상들은 다분히 펠라기우스식 사고방식에 지배받는 모습이다.

펠라기우식 사고방식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과학적 합리주의(민주주의도 이 가운데 포함된다)사상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사조에 결합해 성도들에 의한 교회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추세다.


이같은 바람은 교회안팎의 도덕성회복운동을 통해 앞으로 더욱 강하게 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사회적 관점으로 볼 때 최근의 교회개혁 추세는 매우 합리적이지만, 어거스틴이 그렇게 사수했던 부패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여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개혁드라이브는,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했듯이 개인으로서는 도덕적이지만 공동체를 이룰 때는 비도덕적이 되고 만다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론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죄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은혜체험이야말로 개혁의 출발점이요 한국교회 개혁이 회복할 지향점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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