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기획](상)인본적 교회개혁을 경계한다
상태바
[종교개혁 기획](상)인본적 교회개혁을 경계한다
  • 윤영호
  • 승인 2005.10.26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2005 한국교회 자화상과 개혁패러다임


 

한국교회, 신본주의 가장한 인본적 사상에 무방비 노출   

종교개혁 488주년을 맞는 2005한국교회 자화상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어두운 상황이다. 구호로 외쳤던 성장은 침체로 나타났고, 신앙갱신은 미래좌표 없이 당위성만이 강조되는 실정이다.

끝없는 부패와 갈등, 대립이 난무하는 교회안팎의 상황을 겪으며 한국교회는 그때그때 나타나는 도전에 대응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가운데 현실도피적 임기응변만 늘어간다는 지적이다.


기독교학교의 채플참석을 둘러싼 학생들의 ‘양심의 자유’ 구호를 속수무책으로 방관한데 이어 생명복제로 나아갈 듯한 첨단 과학의 경이로운 현상을 침묵반 우려반이라는 목도하였으며, 교회 안에서는 합리적 목회경영론이 고개를 들며 ‘투명재정’과 ‘담임목회자 선출’ ‘직업인으로서의 목사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등 다분히 합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개혁방안들이 폭주하고 있다.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현재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비기독교상황에 노출된 교회

우리는 유다서 1장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서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서신을 쓴 이유를 밝힌 대목에서 시선을 멈추게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 서신의 초두에서 발견되는 것은 애초 유다가 쓰려고 했던 의도와 다른 내용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솔직히 밝힌 대목이다. 유다가 처음 쓰려던 것은 ‘공동의 구원에 대한 강해’였다.

그러나 유다는 수신자들이 몰린 궁지를 보고받은 이후 이 서신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기로 하고 ‘믿음의 도’에 대한 매우 절박하고도 실제적인 내용을 쓰기로 결심했다.


유다는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 유다서를 쓴 당시 상황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무방비로 노출된 초대교인들이 배교행위가 나타난데 이어 왜곡된 복음을 받아들여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등 심각한 상황이 거듭됐다. 즉, 초대교인들의 믿음이 위협받는 실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믿음의 도’를 굳게 하려는 의도에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떠난 자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유다서에서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유다서의 배경설명을 하는 이유는, ‘개혁’이란 구체적인 현실과의 피 튀기는 싸움을 통해서 진행되는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현재 한국기독교가 보여주는 대부분의 문제(반개혁적 모습들)는 삶과 현실에서 직면하는 반기독교적 상황들을 회피하는데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절박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싸움에 나서지 않고 각자 교회의 생존에만 매달리게 됨으로써 결국 전체적인 존폐상황을 야기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기까지 한국교회가 무뎌진 것은 그만큼 교회가 무거웠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거대해진 교회 틀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도그마’로 변질돼 여간해서는 수정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교회가 개별화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연이든 아니든 한국교회의 이같은 문제 때문인지 개혁을 갈망하는 교계의 일부 그룹은 두 가지 점에서 개혁을 촉구한다. ‘교회제도 개혁’ ‘도덕성 회복운동’이 그것들이다.



빗나간 개혁운동, 인본주의가 문제다

얼핏 보아선 교회제도 개혁 슬로건은 상당한 호감을 주는 내용이다. 역동적인 사회현실로부터 괴리된 교회의 고착화한 제도야말로 반드시 개혁돼야 할 중심 과제라는 것이 개혁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추진하는 개혁드라이브는, 담임목사직의 임기제를 시작으로 목사 장로 신임투표제 실시, 당회의 권한 축소와 교회제직이 참여하는 운영위원회 설치 등으로 대표된다.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 경향과 부합하는 참신성 있는 개혁 내용이어서 사회적으로는 물론 교계 안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최근의 상황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장로교총회에서 발견됐던 금권선거를 제어해야 한다는 각성에서 출발한 도덕성 회복운동은 제비뽑기 선거 도입을 시작으로 대사회영향력 회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공직자 윤리문제가 불거진 최근 우리나라 정치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많은 결과가 예상되고 있다.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교회개혁과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예상하는 최근의 움직임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 운동의 ‘개혁에 대한 시각’ 때문이다. 제도개혁과 도덕성 회복이 추구하는 과정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함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개혁운동 양상이 기독교가 그토록 경계하는 ‘인본주의적 요소’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행위 자체가 갖는 불완전성을 감소시킨 대신 구원받은 성도들의 개혁성만을 너무 부각시킨 ‘역전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불순종에 의한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면서 죄성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의 결과로서 나타날 것을 경고하고 있다. 타락 이후 나타난 살인사건과 바벨탑 사건은 죄성의 결과가 현실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기록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루터가 단행한 ‘면죄부 논쟁’을 재점검해야 한다. 면죄부 논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의 노력결과인지 여부를 증명하는데 있었다.

가톨릭은 인간의 노력(최선을 다한 기도와 헌금, 봉사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루터는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다. 즉, 루터의 개혁운동은 사람을 중심에 놓은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각성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복음을 가장한 인본주의운동

중세시대를 암흑기로 명명하는 세계사의 잣대는 분명 인간중심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인문주의가 성장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어 계몽주의시대를 맞은 상황에서 과거의 중세기는 분명 암흑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적어도 루터 당시의 가톨릭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가톨릭이 얼마나 반하나님적 제도로 운영됐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옥스퍼드대학 알리스터 맥그래스박사의 저서 ‘위대한 기독교사상가’는 이 점을 이렇게 밝힌다.

“16세기 초에 면죄부를 판 수입은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또 교황이었던 알브레히트와 금융거래인 후거 사이의 거래장부가 보여주듯 그 수입은 도처에 마련된 면죄부 수집함을 통하여 유입되고 있었다. …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것과 연관된 만인제사장 교리와 더불어 신학의 영역을 넘어선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이해타산 관계가 얽힌 문제를 그 근원부터 찔러 들어간 것이었다.”


신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가톨릭은 이제 인본적 계산 위에서 제도로 굳힌 물질적 수입을 통해 신본적 세계관을 지탱하려고 했다. 루터는 바로 신본을 가장한 인본의 근원적 뿌리를 폭로하면서 ‘가면 쓴 인본사상 척결’을 주창한 것이었다.


인본주의 사상을 우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래 자유주의가 만끽하는 인간이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경향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계몽주의가 비상했고, 이어 산업혁명을 거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은 비약을 체험했다. 영국의 경험론이나 유럽지역을 휩쓴 합리론 등 철학의 큰 줄기를 형성한 것도 바로 이같은 시기의 일들이었다.


여기서 세계사의 핵심요소들에 주목하는 것은 이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아직까지 주류 사상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이성신뢰 경향이 지독하게 강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값없이 이루어진 구원’을 강조한 것이지 구원받은 성도의 온전함과는 무관한 교리이다.

우리의 신분(지위)이 바뀌었다는 것이지 죄성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구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성화와 견인이 필요한 것이다. 죄성을 간과한 개혁운동은 그만큼 인본적 개혁에 치우친다는 위험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제도개혁이 능사는 아니다

최근 한국교회를 휘몰아치는 제도개혁 파도는 자칫 인본사상을 용납하는 가운데 사회사상의 유입을 허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평신도들의 신앙성숙이 눈에 띠게 신장되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교회개혁 추세였다.

당회 구성의 파격과 운영위원회 설립, 신임투표 등은  기존 교회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평신도들에 대한 신뢰가 기본바탕에 깔린 방안들이다. 실망한 성도들의 최소한의 목소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대안일 것 같다.


그러나 이 방안은 ‘새로운 제도가 사람의 가치관을 바꾼다’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아도 제도개혁을 통해 기존 부패를 정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제도를 만드는 인간들의 판단을 신뢰한 대안이라고 보았을 때 우리는 최근의 개혁운동이 자칫 인본적 체계 위에서 일어나는 위험한 시도들이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


교회역사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정된 것은 아리우스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아타나시우스의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 것 역시 펠라기우스와 기나긴 논쟁을 벌인 어거스틴의 인내였음을 보여준다.

입술 터지는 격렬한 성경적 논쟁 없이 추진되는 여런이 주도하는 최근의 개혁집행을 경계하면서 한 사람의 변화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복음의 운동력을 살린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