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공산정권의 ‘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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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공산정권의 ‘문화대혁명’
  • 현승미
  • 승인 2005.08.2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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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10년

마오쩌둥(모택동)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사회적 동란.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 했던 이 혁명은 사회주의 사회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 없는 혼란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66년 여름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갑자기 출현했던 홍위병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잇단 실각과 마오쩌둥 절대권력의 확립이라는 사태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변동이었다.


중국에서는 당시 문화대혁명을 ‘사람의 혼을 움직이는 혁명’이라 강조하였고, ‘중국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구분 짓는 것으로 공식 규정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62년 9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0회 전체회의(약칭 제8기 10중전회)에서 전당(全黨)·전인민에게 내렸던 ‘절대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출발점으로 한 것인데, 이 ‘혁명’의 최대 목표는 사회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관철에 있었으며, 우선은 ‘당내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한 줌의 실권파’를 뿌리째 타도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 했다.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 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 해 10월 베이징정변 (北京政變)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이로써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시기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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