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1의 도시 ‘샤먼(廈門, 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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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의 도시 ‘샤먼(廈門, 하문)’
  • 현승미
  • 승인 2005.08.2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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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P 7천불의 경제·관광 특구

중국 푸젠 성 남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지구급(地區級) 시로, 북쪽에 있는 퉁안 현(同安縣)도 영역 내에 포함된다. 주룽강(九龍江) 어귀에 있는 샤먼 섬의 남서해안에 있다. ‘바다 위의 정원’이라는 별칭처럼 경치가 빼어난 항구로 앞바다에 있는 많은 섬들이 방파제 구실을 해준다. 이들 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귀에 있는 진먼 섬(金門島)으로 타이완의 국민정부가 장악하여 요새로 만들었다.


송·원 시대에 샤먼은 가목서(嘉木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주로 해적들의 소굴이었으며 밀무역의 본거지로 이름을 날렸다. 샤먼이란 이름은 1394년 해적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처의 하나로 이 섬을 요새화했을 때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1600년대에 샤먼은 타이완을 장악하고 있던 정성공의 통치하에 있었다.


당시 샤먼은 사명성(思明城)으로 불렸다. 1680년 샤먼은 청의 군대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 취안저위(泉州) 수군의 방어사령부가 이곳에 설치됐다. 외국과의 교역은 154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됐으나 그들은 얼마 안 가 쫓겨났다. 정성공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배들이 꾸준히 찾아들었다. 그 가운데 영국 상인들은 청과의 무역장소가 광저우(廣州)로 제한된 1757년까지 때때로 샤먼을 찾아왔다. 그 이후에는 스페인의 배 몇 척만이 샤먼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됐다.


1839~42년 영국과의 사이에 일어난 아편전쟁 결과 중국은 5개 항구를 개방하여 외국인의 무역과 거주를 허용했는데, 샤먼도 그중의 하나였다. 항구 내의 구랑 섬(鼓浪嶼)에 있던 조계(租界)는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19세기에 샤먼은 푸젠 성 동남부에서 나는 차(茶)를 수출하는 항구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샤먼은 타이완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이 재배·생산한 타이완 차를 판매하는 중요한 시장인 동시에 이를 선적하는 항구가 됐다. 19세기 후반에 샤먼을 거점으로 타이완의 개척과 정착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1895년 이후에도 타이완과의 밀접한 관계가 계속됐다. 샤먼은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로 이주하려는 중국인들이 출국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항구였다. 20세기 초 차 무역이 쇠퇴한 대신 과일 및 어류 통조림과 종이·설탕·목재를 계속 수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샤먼은 자체 무역뿐만 아니라 화교들이 본국의 가족에게 보내는 송금으로 번영을 누렸다. 1938~45년에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1949년 이후 샤먼은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1956년 섬과 본토를 잇는 둑길이 만들어졌으며, 샤먼에서 저장 성의 경계까지는 가는 철로가 푸저우(福州)행 지선과 함께 착공되어 같은 해에 완공됐다. 1949년부터 경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과일 및 어류 통조림, 대구 간유, 어분, 여러 종류의 어류를 이용한 수산업, 사이잘 삼의 가공, 설탕 정제, 제혁, 연초 저장 등이 중요한 산업이다. 선박 수리와 토목업도 꽤 큰 규모이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귀국한 화교와 그 가족이 샤먼 인구의 과반수나 됐다. 1921년에는 샤먼대학이 설립됐다. 현재 GNP가 7천불에 달하는 샤먼지역은 경제특구, 관광특구로 급부상하며 중국 제1의 도시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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