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복60년 특집: 격동과 부흥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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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복60년 특집: 격동과 부흥의 시대
  • 윤영호
  • 승인 2005.08.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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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60년, 한국기독교 60년  

 다음 주제: <하>통일한국과 세계선교 비전 



굴곡의 역사와 함께 격랑 헤치며 위대한 성장 이룩    

1945년 해방을 맞은 지 60년이 되는 올해는 한국기독교 60주년이기도 하다. 해방 이전 한국기독교는 일제에 의한 민족말살 정책에 저항하는 한편 민족적 울분의 에네르기를 신앙에 집중시키며 기독교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해방 이전 한국기독교는 반제국주의적 역량을 결집하는 ‘저항의 영성’을 드러내며 민족통합의 거대한 몸부림을 주도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일제시대 한국기독교는 “교회보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친일적 행태를 벌인 일부 지도자들의 판단 때문에 반민족적 지탄을 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숱한 순교의 틈 속에서 당대의 기득권자들과 호흡을 함께한 한국기독교의 빛바랜 과거는 현재 진행되는 ‘과거청산’의 강한 회오리 속에서 생존의 몸부림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방 6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기독교 60년은 이렇게 오늘날까지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 개의 길’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강대국의 패권경쟁의 정점인 ‘6.25 한국전쟁’이후 분단을 지내면서 심각한 내면적 왜곡현상을 빚는 한편 국가주도적 경제발전 정책에 편승해 소위 성장지상주의와 물량주의로 외형적 뒤틀림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 정책

한국 현대사는 6.25한국전쟁을 출발로 시작한다. 이는 분단이 한국민에게 끼친 영향력이 가히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종결되면서 동북아시아는 전쟁이후 세계제패를 꿈꾸는 강대국의 대리전 양상을 띤다.

태평양을 사이에 놓고 일대 혈전을 예고하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한국전쟁을 통해 태평양에 대한 우위권을 확보한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반세기를 지나 언제 극복될지 모르는 ‘분단’이라는 상처를 남긴 역사이다.


분단이 한국기독교에 가져다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과 반공정신을 공유하는 반공애국신앙이 교회저변에 확산되고 있었으며 격동기의 한국사회 변화를 뒤로한 기복신앙 행태가 주류를 이루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신흥종교들, 소위 사이비운동이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해방을 맞으면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갈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친일세력이 곧 반공세력으로 둔갑한 현실을 목격하고서야 제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독립운동그룹 탄압에 가세했던 반공그룹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이제는 교회지도자로서 다시 한 번 날개를 크게 휘젓게 된다.


1901년 미국선교사들이 천명한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선언’이 일제시대 당시 큰 영향력을 끼친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단상황 속에서 역시 비정치적 신앙의 순결함을 역설하며 교회부흥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압축되는 산업화 정책과 결합돼 교회성장운동으로 대전환을 이룬다.

현재까지 지적받는 물량주의나 성장지상주의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략적 정책이기도 하다.


당시 군사정권은 산업화에 필요한 재원조달을 위해 일제시대의 피해보상 차원에서 졸속합의서를 작성, ‘한일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서는 월남전 파병을 담보로 무상지원을 받아낸다.

성장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은 군사정권 아래서 한국교회는 반공적 신앙패턴을 유지함으로써 교회성장 속도를 발 빠르게 진행하게 된다.


하지만, 교회성장을, 불의한 정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교회사명 실현을 위해 그의 목적대로 사용하신 결과로 평가하기도 한다.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통해 포로된 이스라엘을 귀환시켜 민족적 숙원이었던 성전건축과 예루살렘 예배를 하도록 했다는 성경기록의 예를 한국교회에 적용한 결과, 하나님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군사정권의 정책을 배경삼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도록 섭리했다는 것이다.



빠른 성장 속 분열과 건강성 상실

분단과 산업화 정책은 한국교회의 성장에 끼친 중요한 외적 요인들이다. 교회는 분단을 내면의 아픔으로 가지면서도 이를 반공에 결합시켜 성장의 지렛대로 활용했으며, 정부주도형 산업화 정책을 지지하는 가운데 교회성장을 촉진하는 이념적 기초를 제공받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균열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이른바 분단체제를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부정할 것인지에 대한 교회의 생각들이 점차 거리를 멀리하면서 교회는 내부적으로 보수/진보라는 전형적인 사회갈등 현상을 드러내고야 만다.


분단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보수그룹은 분단상황 아래 전개되는 각종 정부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는 반면 진보그룹은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정책들을 펼쳐 정부정책에 갈등하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친일부역=반공그룹=보수기독그룹’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진보기독교 그룹과 긴장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사회통합과 일치’를 지향해야 하는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달성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곤 했다.


지난 60년 동안 한국기독교는 민족복음화 실현이라는 대장정의 길을 걸어오면서 두 갈래의 길, 소위 진보의 길과 보수의 길로 나뉘어 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현실에 뿌리를 두고 사는 인간인 이상 국가적 상황에 한 가지 생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민족을 복음화하시기 위해 일제의 폭압에서 신앙을 단련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해서 세속이념의 참혹함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시는 등 보수적 활동과 진보적 활동 모두의 틈 속에서 기독교신앙을 자라도록 섭리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같은 복음화의 섭리 가운데 가장 문제로 남는 것은, 여전히 우리 속에 있는 ‘죄성’에 대한 문제이다. 죄성을 고려하지 않은 성장정책의 부작용이 교회 안팎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성장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던 지난날의 판단에 대해 심각한 반성이 진행되고 있다.


메가처지로 분류되는 ‘초대형교회’의 출현과 작은 교회들의 잇단 폐쇄현상. 초대형교회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재원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등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영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회계층별 모임을 주도하는 반(半)종교그룹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 80년대 초, 산업화 과정이 치밀하게 진행되던 시기 한국교회는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피폐화되는 농어촌지역에 복음선교를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한편으로는 도시빈민을 향한 선교에도 역량을 집중시켜 왔다.

하지만 70년대 말 터진 서울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씨의 분신사건 이후 노동자층의 대정부 불만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물리력이 강화되면서 교회도 정부와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른바 ‘도시산업선교회’ 사건이 그것.


공장지대 노동자 선교와 부당해고 및 임금문제 그리고 각종 인권문제까지를 도맡아 오던 교회가 정부의 계산된 압력에 강한 반발을 하게 되는 시기다.

정부는 도시선업선교회를 이용한 불순세력(=친북한 인사)이 침투했다며 교회의 산업선교 일체를 불허하게 되는데 이 때를 전후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진보그룹과 마찰을 빚게 된다.


이 당시 도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정부주도형 수출정책과 성장정책을 지지하는 교회들의 적극적 협력 속에 주목받을 만한 부흥을 경험했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이런 격변의 과정을 거친 60년 동안 한국기독교는 친정부 혹은 반정부라는 이념적 가치를 경험하면서 매우 힘겨운 선교활동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4년,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년을 기념하는 선교대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서 거행됐다.

이에 10년 앞선 74년에는 일부 기독교그룹이 불참하기는 했지만, 빌리 그래이엄 목사가 주도하는 엑스플로74대회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는 내부적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었고, 외부적으로는 정치적인 격동기와 함께 한 한국교회의 성장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투성이요, 정치에 야합하는 굴절된 모습의 연속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이와같은 상황에서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위대한 구원행동’의 주체자임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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