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은 상처, 그러나 통일의 꽃은 피어난다

2001-06-22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1년. 민족 비극의 현장 철원을 찾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의 중심지 철원을 둘러보니 그 때의 총성이 귓가를 울리는 듯 했다.

동부간선도로를 빠져 나와 울창한 숲에 싸여있는 43번 국도를 2시간 남짓 달려 철원에 들어섰다. 철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전적기념비, 타일랜드군 참전기념비 등 전쟁의 흔적들을 목격할 수 있었지만 철원은 좀 두드러졌다. 도로 곳곳에 탱크의 소통을 방해하는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는가 하면,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비무장지대임을 알리는 철책선이 한 눈에 들어왔고 지뢰매설 지역을 경고하는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긴박했던 격전의 상황이 조금씩 상상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취재진을 반긴 건 한반도기로 장식된 승일교였다. 모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승일교는 여러가지 소문이 있지만 철원군청 관광안내과 김대철씨는 “북한의 김일성이 다리의 반을 건설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 다리의 나머지 반을 완성해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승일교’가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차량통행이 통제돼 사람들의 왕래가 적지만 승일교에 한편을 장식한 ‘통일이여 어서 오라’는 문구가 통일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길을 곧장 따라가면 휴전선과 전적지가 즐비한 민간인 통제지역에 들어서게 된다.

민통선의 첫 인상은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다. 너무도 평화로와 보이는 시골이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뒤로 한 농부가 모내기를 마친 논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동네 아낙네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적하리만큼 소박한 농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게 펼쳐진 풍요로운 철원평야가 전쟁의 아픔을 보듬고 있었다니….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지난 1975년 발견된 제2땅굴을 찾았다. 건장한 청년 둘이 간신히 통행할 정도 크기의 제2땅굴. 한시간만에 3만여 명의 병력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 땅굴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많은 경제적 손실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남겼던 한국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호시탐탐 남침 야욕을 보인 북한의 비이성적인 작태에 격분했고, 원시적인 도구로 3.5km에 달하는 땅굴을 파는데 혹사당했을 북한 주민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 착잡한 마음은 땅굴 견학을 마치고 나온 수원고등학교 한영규(17)군이 잘 대변해줬다. “한국전쟁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화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땅굴 같은 전쟁의 불씨를 살려야만 했던 현실이 마음이 아프다”고 말이다.

제2땅굴이 드리운 어두운 마음은 철의 삼각 전망대에 들어서자 사무친 그리움으로 이어졌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어디론가를 향해 걷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에게 다가갈 수 없을까. 잠시라도 좋으니 저들의 손을 잡고 웃음을 전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50년이나 품어온 이 민족의 상처가 금방이라도 아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철책선은 우리의 발목을 굳게 잡고있었다. 군사분계선 너머 내 형제의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바로 지척의 형제를 애써 외면하며 분단과 함께 끊긴 경원선의 월정리역에 다다르자 앙상한 뼈만 남은 ‘철마'가 오랜 시련에 지쳐 누워 있었다. 녹슨 잔해 사이에서 자라난 풀처럼 ‘철마'도 소생할 수 있을까. 눈을 돌려 무용지물이 돼버린 금강산 전철과 경원선의 분깃점을 찾고 끊어진 철길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폐허가 된 노동당사 건물은 번성했던 철원지역의 이야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통일은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 건물 지하실에서 탄압 받던 반공인사들의 비명소리가 귓전에 울려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하나님은 왜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아픔을 허락하셨을까. 우리 민족을 위해 얼마나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길래 이렇게 비틀거리며 반세기를 걷게 하신 것일까.

이정표를 따라 돌계단을 올라 옛 철원제일감리교회 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제단이 있던 자리를 향해 기도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다시 살게 해달라고… 어서 속히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숙연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져 왔다.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나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교회가 십자가를 내걸고 있었다. 철원에는 전체 주민의 20%가 기독교인이며 76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모진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성도들이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든든해졌다.

지난해 6월15일. 남북정상의 만남은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선물했고 통일은 바로 코앞에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들뜬 분위기도 잠시, 우리는 지금도 북한과 대치해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참전기념비 앞에서 군인들의 동상을 신기한 듯 쳐다보던 여섯살박이 꼬마는 할아버지를 따라 두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그리곤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빨리 통일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잃어버린 가족들을 만나 웃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은 비극의 땅 ‘철원’. 상처 속에서도 철원은 행복한 통일을 꿈꾼다. 녹슬어 뼈대만 남은 기차틈새로 가녀린 꽃망울을 터뜨린 한 송이 나리꽃처럼, 통일의 꽃은 힘겹게 피어나고 있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구자천기자(jckoo@ucn.co.kr).

기독교 역사의 현장 - 철원제일감리교회
무덤으로 변해버린 ‘구국의 기도처’

철원제일감리교회(이하 철원교회)는 3·1운동의 아픔을 딛고 1920년 이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16년뒤인 1936년에는 철원읍 관전리로 자리를 옮겨 건평 2백여평, 지하 1층 지상 3층의 현대식 예배당을 봉헌하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긴장해 있었던 일본은 주민통제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교회 강종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를 설파했고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돼 그 감옥에서 순교하기에 이른다.

철원교회의 수난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철원교회는 북위 38도 14분에 위치한 지리상의 특성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지도자를 두려워했던 북한정부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50년 6월24일 한국전쟁 전야. 북한은 대대적인 목회자 색출에 착수했고 이 상황에 철원교회 김윤옥목사를 비롯해 조춘일 한사연 서기훈 이동영 박승학목사 등 9명이 희생되기에 이른다.

46년 철원교회에 부임한 김윤옥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상임이사를 지냈던 김병조목사의 아들로서 3·1운동에 앞장섰던 부친의 뜻을 받들어 38선을 넘어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신한 애국 청년회’를 결성해 반공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 해 일망타진되고 김목사는 8년형을 받고 1947년 부친이 옥사한 바로 그 평양형무소에서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철원지역 목회자들의 순교는 수많은 희생의 서막이었다. 장흥교회 김화교회 금성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이 전화에 휩싸이며 폐허가 됐고 퇴각하던 북한군은 폐쇄된 교회공간을 이용해 성도들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서슴치 않았다. 철원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성도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지하실이 무덤이 될 줄이야. 나라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무너져 내린 돌더미속에서 수 십구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그들의 애절했던 마음은 한국교회 역사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으며 애국애족에 앞장섰던 철원제일감리교회.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볼품 없는 돌들과 현판만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애절한 나라사랑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철원을 지키고 있었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북의 동포들에게 복음 전하고파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원들은 철원 지역의 교회들을 폐쇄했고 목회자와 신실한 청년들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철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철원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춘용목사(철원장로교회)는 6.25 전쟁 당시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50년 전만 해도 그가 자랐던 김화군 유골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이목사 가족은 매주 금강산전철을 타고 지금 북한에 속해 있는 금정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러 다녔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이목사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을 성도들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철원 주민들의 신앙이 견고하게 세워졌다고 이목사는 전했다. 성도들의 순교정신과 애국정신이 지금의 철원을 지탱해온 힘이었다고…. 그사이 철원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토착신앙도 서서히 사라져 갔고 교회가 전후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데 교육적, 문화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이목사에게는 뚜렷한 비전이 있다. 통일의 문이 열리면 철원의 교회들이 앞장서 북에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철원이 통일한국의 중심지가 되고 물류와 선교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철원지역의 14개 교회들은 ‘기도동지회’을 결성해 북한선교를 준비하고 있다. 철원에 선교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켜왔는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목사는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을 품는 것이 통일의 첫걸음임을 간곡히 당부했다.

구자천기자(jckoo@uc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