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명 신앙인들의 발자취, 우리는 나갈 길을 배웠다

■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2019-12-26     이인창 기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중기획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10개월 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민 중 하나는 이 시대 해당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였다. 특히 ‘친일’ 논란을 가진 기독교인이 문제였다. 


지난주 연중기획 결산 (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1운동 당시만 해도 기독교 교세는 최대 1.5%에 불과했지만 전체 투옥자 수의 4분의 1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열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변절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이 있다.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훗날 엄청난 친일 행적을 남겼다. 결코 다룰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중기획 안에서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 소수 포함되기도 했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한 인물의 삶 또한 역사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과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 해방된 조국을 꿈꾸었지만, 영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친일 과오, “해방이 될지 몰랐다고?”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이었지만 친일 밀정으로 배신자의 길을 걸었던 염석진(이정재 역)은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재판에서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자 독립운동가 안옥윤(전지현 역)이 그를 암살한다. 그리고 그 직전 왜 민족을 배신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재판정에서 투철한 독립운동가라고 자신을 대변했던 그는 비로소 총구 앞에서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내가 해방이 될 지 어떻게 알았겠냐고”라 대답한다. 

일제 36년을 통틀어서, 아니 3.1운동 직후라 하더라도 일제의 폭압 아래 자신의 정체성과 결기를 포기한 변절자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정춘수 목사는 독립선언문에 찍을 도장을 맡기고 목회지 원산에서 머물다, 3월 1일 만세운동 날에 맞춰 서울을 찾았다. 그는 독립선언식이 모두 끝나고 서명자 모두 일경에 체포된 것을 알고 직접 종로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결국 그가 1938년 이후 보여준 행적은 참담한 지경이다. 일제가 협력해 주면서 조선감리교 감독으로 선출되고 일제 황민화 정책에 적극 가담했다. 심지어 교회 종까지 무기를 만드는 데 써달라고 헌납했다.  

우리가 연중기획에서 다룬 인물 중 좌옹 윤치호도 대표적 친일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다재다능한 외교관이자 거물급 민족지도자였던 그는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생애 대부분을 민족교육과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역사가들은 그가 근대사에서 기독교의 기능과 역사적 사명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친일 행적을 펼치고 만다. 

정춘수 목사와 좌옹 윤치호 같은 인물이 훗날 친일로 변절했다. 이런 신앙인들 때문에 당대 기독교 전체를 매도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부당한 일이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기독교는 폭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과 기독교의 민족의식 전통, 신앙의 자유에 대한 탄압에 대한 저항 때문에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며 “후일 친일의 길을 간 기독교 지도자들 때문에 독립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친일 행적을 남긴 그들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으로 가는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민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던 자랑스런 기독 독립운동가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공과 과만 갖고 매도해서는 안돼”
우리는 현재의 시각에서 지나치게 평가절하 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장로이다. 현재까지 이승만은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안전하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피난 갔던 기억, 3.15부정선거 등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려고 했던 시도에 대해 분명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서 걸었던 역할마저 거부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김명섭 교수는 “공만으로 우상화해서도, 과만으로 인생 전체를 매도해서도 안된다”면서 “과오와 공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몽양 여운형과 같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좌우합작 운동을 했던 신앙인의 삶도 일각에서는 좌익인사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몽양은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신학교에서 열정적인 설교를 하고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1920년 조선독립을 지원한다는 말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그 사실로 오랫동안 공산주의로 낙인찍힌 평가를 받아야 했다. 2005년에야 훈장 추서를 받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를 일컬어 사회주의를 수용한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당시 사회주의는 지금 실패가 확인된 공산주의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선택한 과정이었다. 그는 분단의 결과로 남아버렸지만, 당시 좌우 합작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생애는 기독교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발자취들이 남아 있다. 

36회에 걸쳐 기독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하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중기획을 전개했고, 두 차례 결산으로 연중기획을 되돌아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신앙인에게, 변절의 길을 걷고만 기독인에게서 우리는 무엇인가 분명 배웠다. 꿈꾸는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길을 향해 나갈 방법,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