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해명’(1) (Fidei ratio, 1530)

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66

2019-10-29     주도홍 교수

역사적 배경 

격동의 종교개혁시대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대내외에 천명해야 했다. 황제는 1530년 1월 각 교파의 대표자들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로 초청해서, 그들 각자 다른 신앙 교리를 확실히 해명하길 원했다. 세 부류 곧, 루터파, 로마교회 그리고 남부 독일과 독일어권 스위스 도시들이 이에 속하였다. 루터교회는 루터가 작성한 ‘슈바바허 조항’을, 로마교회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대적자 에크를 통해 형성된 ‘404조’를, 신학적으로 루터파와 취리히 사이 위치한 스트라스부르 교회는 ‘테트라폴리타나 신앙고백’을 제출했다. 취리히를 포함한 독일어권 스위스 도시들은 복잡하게 얽힌 종교 정치적 상황과 주어진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황제에게 신앙을 해명할(Rechenschaft ueber den Glauben) 수 없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초대를 받지 못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는 달리, 스트라스부르 교회 대표로 제국의회에 참석한 야콥 슈투움(J. Sturm)은 소식과 함께 의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1530년 6월 24일 츠빙글리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소식을 접한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앙을 해명하여 제국의회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최대 3일간 급하게 신앙을 요약정리한 츠빙글리는 10일 후 1530년 7월 3일 황제와 믿는 자들을 향한 ‘신앙 해명(Fidei ratio)’을 취리히에서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신앙 해명’과 1530년 8월 20일 발표한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는 세상을 떠나는 1531년 초 작성한 ‘그리스도교 신앙 해설’(Christianae fidei expositio)과 함께 츠빙글리의 마지막 결실이다. 3대 결실은 츠빙글리 개인의 신앙고백과 동시에 16세기 형성된 개혁신학의 정체성과 함께 종교개혁 시대 핵심 논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5대 목표

‘신앙 해명’은 다섯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츠빙글리는 중세교회의 잘못된 성례 이해에 반해 성령의 자유와 능력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한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도 하나님의 본성처럼 언제 어디서나 무소부재하다(Ubiquitaetslehre)는 루터의 공재설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단번에 역사적으로 이룬 십자가의 화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셋째, 츠빙글리가 재 세례파와 호의적 관계라는 세간의 비난에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가장 근본적이고 유일한 신앙의 근거는 오직 성경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교회, 사회, 정치 차원까지 개혁하고 새롭게 하기에,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 위에 군림하는 중세교회의 오류와 황제의 잘못을 강하게 대적한다. 다섯째, 정확한 성경해석을 통한 신학적 증언만이 가치를 지닌다.1)

1) ‌Ulrich Zwingli, Huldrych Zwingli Schriften IV, (TVZ 1995), 95-97. Peter Opitz의 서문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