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교파를 초월해 ‘하나되는 교회’로

(18) 한국교회의 연합사업 I

2015-07-22     김목화 기자

한국 기독교계는 1905년 강력한 교회 합동운동을 제기한 바 있다. 비록 선교본국 교단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교파를 초월한 ‘하나된 교회’로 ‘대한예수교회’를 수립하려는 운동이 진행됐다. 그 무렵은 원산부흥운동(1903)과 러·일전쟁(1904)을 겪은 직후였다.

그 후 3·1운동이라는 민족적 변혁을 체험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또 한차례 교회 합동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전개됐다. 1905년에는 한국인 교인들 가운데서 합동의 요구가 먼저 제기되었으나 선교사들 사이에서 먼저 문제가 제기됐다. 선교사들이 교회 합동 문제를 거론하게 된 배경은 선교지인 한국에서의 선교 상황을 고려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 기독교계에 일기 시작한 교파 연합 및 합동 분위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1919년 6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남장로회 벨(E. Bell)의 글이다.

“요즘처럼 교회 합동 문제가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부각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 모든 선교지의 사역자들, 특히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선교구역 분할이라든가 연합 및 합동 문제가 모든 선교사업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이 문제가 이처럼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니 모든 기독교 사역자들은 이 문제를 직시하고 전체 문제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특히 1918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낙관주의 사회 풍토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초교파세계교회운동’은 한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조화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예배 형식이나 교회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포기하겠다. 세례 형식에 대해서도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겠다. 장로교가 다른 어느 교파보다 성경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장로교를 사랑하지만 장로교인이란 칭호도 포기하겠으며 장로교의 교회 정치마저도 포기하겠다. 감독주의 교회 정치라도 받아들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진다면 감독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이같은 교회 합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열정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냉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