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있는 아빠에겐 핸드폰 없어요?"

폭탄테러 희생자 故 김진규 목사의 사모 박여진 전도사 인터뷰

2015-04-28     이성원 기자

지난 해 2월 16일 현지시간으로 오후 2시.

진천중앙교회 교인들이 탄 버스가 이집트 성지순례를 마치고 국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차안에서는 수고한 가이드에 대한 박수가 쏟아졌다. 이내 집에 돌아간다는 설렘으로 잔잔한 휴식이 찾아왔다. 아무도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지 못했다.

순간 버스에 폭탄 테러범들이 들이닥쳤다. 앞자리에 김진규 목사와 함께 있던 제진수 집사가 테러범들의 승차를 막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폭탄을 앞바퀴 쪽에 터뜨렸다.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불같은 바람이 밀려왔다. 제진수 집사와 김진규 목사가 그 앞을 막았다.

순식간에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버스.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그만큼 폭탄의 위력은 컸지만 다른 30여명의 승객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심하게 훼손된 두 사람의 시신이 그 희생을 깨닫게 했다.

귀국한 생존자들은 김진규 목사의 아내 박여진 사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거예요. 제진규 사장님과 함께 폭탄을 몸으로 다 받아내셔서 우리가 살았어요.”

“천국의 아빤 핸드폰 없어?”

“워낙 건장하고 강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폭탄이 터졌어도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박여진 사모. 텔레비전 뉴스에 계속 뜨는 남편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던 그때로부터 벌써 1년 두 달이 지났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딸 아영이에게 아빠의 죽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

아빠는 천국에 갔고 나중에 다시 만날 거야, 우리가 갈 수는 없어’라고 설명했을 때에, 아영이가 물었다. ‘아빠는 핸드폰 없어?’ 사고로 망가졌다고, 전화할 수 없어 속상하다는 대화가 이어지곤 했다. 이들 모녀는 올해 초 이렇게 많이 힘들었다.

“평상시 살면서 가끔 울컥, 할 때가 있어요. 어디 식당에 가서 아빠, 엄마, 아이들 이렇게 같이 온 가정을 보면 목사님이 생각나죠. 우리도 그때는 셋이 함께 왔었는데, 지금은 없으니까요. 다른 가정들은 일상인데, 그런 부분이 우린 부러운 거죠.”

세 식구가 함께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본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함께 제주도라도 한번 다녀왔더라면. 배도 함께 타 본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너무 빨리 갔다. 아이 키우느라고 정신없던 시절에, 남편은 떠났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더 잘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많죠. 저도 그때 아이 양육하던 때였고 목사님도 한창 교육받고 바쁜 때였죠. 아이 때문에 목사님을 많이 못 챙겨줬어요. 좀 더 여유롭게 보살펴드리지 못했고, 밥도 많이 차려주지 못했고, 기도도 많이 못해줬어요. 그게 미안해요. 막상 가고 나니까 그게 미안해요.”

하나님께선 김 목사를 왜 이렇게 빨리 부르셨을까?

김 목사 부부는 선교 비전으로 함께 만났다. 아시아선교센터에서 박여진 사모가 간사로 있을 때에 인연을 맺었다. 둘은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다. 이슬람 지역에 선교사로 나갈 것을 준비하며 양계 기술, 전기 설비 등과 같은 교육도 받았다.

그는 교회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레크리에이션 교육을 받은 그는 웃음치료사로서도 활동했다. 항상 활달한 성격에 유머감각까지 곁들어 교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교회 권사님들은 항상 “우리 교회에서 제일 잘생긴 목사님은 담임목사님이시고, 두 번째로 잘생긴 목사님은 김진규 목사님이야”라며 그를 안아주곤 했다. 아들처럼, 손자처럼 그를 좋아했다.

선교적 마인드가 확실하고, 필요한 교육도 철저히 받았고, 타고난 열정도 넘치는 선교 지망생 김진규 목사. 그는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렇게 꿈꾸던 중동 지역 선교사로 어디선가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교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그를 거둬가셨을까? 너무 아깝지 않나? 이 질문에 박여진 사모는 답을 얻었을까?

가장 아름다울 때 순교했다

“목사님은 그때가 가장 성령충만했던 때였어요. 아랍 중동지역을 선교하려고 모든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던 때였어요.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하더라도 그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결단하고 마음먹었던 때였습니다. 김진규 목사가 가장 신앙이 충만했을 때에, 하나님이 데려가신 겁니다.”

어쩌면 그는 열정이 많은 만큼 욕심도 많았을 수도 있었다. 뭔가 일을 많이 하려는 의지가 불탔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인간적인 열심으로 일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헌신이 충만할 때에, 그를 불러 가신 듯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사역의 결과보다도 순수한 김진규 목사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다.

한국에 선교하러 대동강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목사님. 그 역시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펼치기도 전에 대동강 백사장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러나 그를 참수한 박춘권이 훗날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가 던진 성경책이 한국교회의 씨앗이 됐다. 실제로 김진규 목사는 생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선교사님들은 왜 이곳에 와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오다가 죽고, 언어 배우다 죽고, 병에 걸려 죽고...내가 그들에게 죽거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이라는 두려움이 하염없이 밀려온다. 그런데 왜 자꾸만 자꾸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걸까?”

현재 시냇가푸른나무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영아부 전도사직을 맡아 사역하고 있는 박여진 사모는, 김 목사의 죽음을 통해 “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주셨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청년 시절에 은혜와진리교회를 섬겼던 그녀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선교연합부장을 맡았다. 수백명을 선교에 동원하고 강의도 맡을 만큼 선교의 열정이 뜨거웠다. 그러나 사모의 자리에 있게 되면서 열방에 향해 그전처럼 기도하지 못했다. 선교 열정도 수그러들었다.

테러하는 무슬림들도 피해자

“하나님께 목사님을 왜 데려 가셨어요, 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요. 저의 영혼도 안일한 사모의 자리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더 젊었을 때에 더 일하라고 하신 것 같아요. 목사님 계실 때에는 제가 뒤에서 서포트만 했는데, 하나님은 저도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그녀는 남편을 죽인 무슬림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테러를 ‘지하드’(거룩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테러를 통해 알라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무찌르고, 그로 인해 죽는 걸 순교라고 받아들인다.

“저희 목사님은 순교이고 하나님 곁에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일로 죽은 겁니다. 사탄이 그렇게 무슬림들에게 지하드를 시키고 자기 영역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들이 불쌍한 것이죠. 그들이 예수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요, 그들도 피해자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들의 땅에 선교사로 갈 것이다. 남편은 그들의 폭력으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녀는 그들을 십자가의 마음으로 품을 것이다. 이런 그녀의 존재자체가 무슬림들에겐 복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메시지’다. 하나님은 남편이 이루고 싶었던 선교의 꿈을 그녀에게 맡겨주셨다.

'너를 이방의 빛이 되어 갇힌 자를 감옥에서 끌어내리라’(사 42:6-8). 작년 6월부터 말씀을 통독했다. 사역의 자리로 나가기 전에 약속의 말씀을 구했다. 하나님 주셨다. 힘을 얻었다. ‘아, 하나님이 행하시겠구나. 내가 아픔 속에서 어둡게 있는 게 아니라 빛 가운데 나아길 원하시는구나! 지금은 어렵지만, 지금은 재앙같이 느껴지지만, 나에게 주시려는 건 미래와 소망이구나!’

박여진 전도사는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들고 담대히 앞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