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팽목항으로… 그는 쉴 수 없었다

진도군교회연합회장 故 문명수 목사의 부인 김금숙 사모

2015-04-15     이인창 기자

걱정이 앞섰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사모로 힘겹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조금씩 잊혀져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해 10월 3일 52세의 나이에 별세한 당시 진도군교회연합회장 故 문명수 목사를 기억하고 그가 보여준 희생정신을 되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명수 목사의 부인 김금숙 사모(50)와 약속을 잡은 지 일주일 후 지난 2일, 진도군청 후문에 자리하고 있는 진도만나교회를 찾았다. 군청 인근이라지만, 교회 뒤편에는 야트막한 언덕 아래 비탈밭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2층짜리 단출한 예배당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문명수 목사, 희생자 가족들 곁에 그가 있었다.

“저희 목사님을 기억하기보다는 아직까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먼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식구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오래 끌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내 일이라면 그렇게 못하죠.”

김금숙 사모는 문 목사님의 삶이 어떻게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들에게 기억됐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현장에서 도왔던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문명수 목사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4월 16일부터 희생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팽목항과 읍내 실내체육관을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사고 초기에는 단 한 명의 탑승객이라도 건져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했다.

특히 250여명의 단원고 학생들은 자신의 막내아들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생들이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면서도 살려달라는 기도는 쉼이 없었고, 현장을 향한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4월 28일 문 목사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말았다. 한 달여의 투병 끝에 퇴원을 했지만, 문 목사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10여일 만에 패혈증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피부가 괴사하는 고통도 있었다. 그리고 이후 4개월여 투병 끝에 지난 10월 3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책임자이기 때문에 내가 쉴 수는 없었다”

문 목사가 세월호 참사의 현장 속에 있으면서 얼마나 고뇌하고 있었는지 대학병원에 있을 당시 정신과 진료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김금숙 사모가 기자를 만나 공개한 전남대병원 진료기록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쉴 수가 없었다. 책임자로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을 안 쓸 수도 있었지만 나는 책임자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세월호 가족 보다 만분의 일이라도 내가 더 희생해야 했다.”

담당의는 문명수 목사가 이야기하는 증상에 대해서도 적어두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문 목사는 “‘빨리 와라 왜 거기 있느냐’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속에 있는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인다”,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금숙 사모는 평소 운동을 좋아했던 남편이 그렇게 황망하게 떠날 줄을 몰랐지만, 책임감에 너무나 강했던 남편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 연합회장을 맡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미루다가 결국 3월경에 회장을 맡았는데 그 때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초기에는 많은 교회가 참여하지 않거나 활동에 대한 의견차로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남편이 열심히 활동하다 병원에 가게 된 후 진도군 교회와 교인들이 다 협력하게 됐습니다. 남편은 밀려들어오는 물품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감, 비난받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문명수 목사는, 적어도 김금숙 사모에게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사역하다 살다간 믿음의 사람이었고, 진짜 목회자였다.

어머니는 씨를 뿌렸고 아들은 거두었다.
문명수 목사의 신앙은 사실 대를 잇는 것이었다. 김금숙 사모는 자신의 시어머니 역시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진도에서 6곳의 교회를 개척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시어머니가 1996년 마지막으로 개척한 곳이 진도만나교회였고, 아들 문 목사는 초기부터 교회의 기초를 세우며 사역을 일으켜왔다.

진도 토박이이기도 했던 문 목사는 10년간 전도사로 사역하다 2004년에야 목사안수를 받았다. 굳이 목사안수를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문 목사는 초기 조립식 건물의 교회를 벗어나고자 건축을 시작했다. 재정이 부족해 문 목사가 직접 기술자들을 불러와 함께 지었고, 시간은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문 목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2년만에 교인들과 예배당을 완공하고 말았다.

문 목사가 떠난 교회에는 지난 12월 새로운 목회자가 왔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며 25명 교인들은 은혜를 사모하며 교회의 사명을 되새기고 있다. 김금숙 사모는 그런 교인들이 참 고맙다.

다행히 김금숙 사모는 교회가 법인으로 등록해 운영해온 어린이집 원장으로 활동해와, 지금도 그 일을 이어가고 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하고,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시기였지만 지금은 잘 이겨내 가고 있다.

“홀로 되신 다른 사모님이 일 년 동안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습니다. 행정적으로 후속조치를 할 게 많았어요. 그러다가도 이렇게 날씨가 흐리면 남편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의사자 지정’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돼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진도군과 지역 정치인들이 나서 추진하고 있는 문명수 목사에 대한 의사자 지정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보건복지부가 의사자 지정에 대한 심사를 진행했지만, 서류미비 등을 이유로 다음 분기에 다시 심사하기로 한 것이다.

문 목사가 별세했을 당시 기독교계 단체들도 속속 의사자 지정을 촉구하는 입장들을 밝히기도 했다.

문명수 목사가 아무 이유없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현장에서 뛰어다니다 목숨을 잃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의사자 지정이 이렇게 늦어질 이유가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가 의사자 지정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을 때임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또 한 사람 고 문명수 목사를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