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터처블

김한호 목사 (춘천동부교회)

2015-04-15     운영자

얼마 전 한 여자 분이 교회에 오셨습니다.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에게 중증장애를 가진 20대 딸이 있는데 그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팔꿈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딸과 함께 교회에 와도 되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딸의 모습이 혹은 갑작스러운 딸의 행동이 예배에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크셨던 것입니다. 현실적인 염려입니다. 한번은 휠체어를 타신 집사님과 식사를 가는데 휠체어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음식점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편의를 고려한 예배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과의 만남 이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온 장애인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설교 시간에 강단에서 적절하지 않은 장애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장애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면? 교회 행사를 기획할 때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기획으로 장애인이 참여할 수 없다면? 엘리베이터, 장애인용 화장실, 점자 주보와 수화 및 자막 정보 등 편의시설이 불편하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다시 한 번 교회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 꼭 시설물에만 해당할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식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공식명칭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소경’이란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지체장애인, 언어장애인 등의 용어도 더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사회적 인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장애인을 만나자 마자 “누구의 죄로 인하여 장애를 갖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본인의 죄든가 그 부모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장애는 죄 때문이라는 당시의 편견 된 인식을 보여줍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모든 사회는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전통종교의 영향이 사람들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샤머니즘 전통에서는 장애인이 태어나면 가족들이 한 잘못에 대한 벌로 장애아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유교적 전통에서는 자손은 가문을 빛내야 하는데 장애인은 가문을 빛내지 못하다보니 결국 장애인을 수치를 주는 자로 생각합니다. 이런 부정적 인식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장애에 대한 잘못된 용어나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부적절한 시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장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언터처블’이란 프랑스 영화를 보았습니다. 전신불구의 백만장자와 건강한 신체가 전부인 무일푼 백수의 우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서로 도저히 가까워 질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 언터처블(untouchable)입니다. 이들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해줄 때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언터처블이 많습니다. 장애와 비장애만이 아니라 타문화권의 사람들, 정치인들, 교회 안에도 수 없는 언터처블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십니다. 우리도 언터처블을 만들지 말고 예수님처럼 다가갑시다.


오늘날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80% 이상이 후천적 장애인입니다. 20%만 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고, 나머지 80%는 살아가면서 사고나 병의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입니다. 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차별을 갖지 말고 함께 다가갑시다. 진짜 장애가 무엇인지 압니까? 장애를 느끼게 하는 사회구조와 잘못된 시선으로 가득 찬 사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태어난 존귀한 존재입니다. 서로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출애굽기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