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해진 교회가 순교영성 위축불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순교의 영성’이란 말에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복지와 안락함 그리고 편리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대를 21세기의 한 특징이라고 하면, ‘순교’는 앞에서 밝힌 것처럼 고난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안락/고난의 상반된 두 개념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어색한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안락을 추구해왔고, 그 상황 가운데 복음의 열정에 타오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안락함 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하며 살아온 것을 상기하면 ‘순교의 영성’을 낯설어 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통해 식어진 복음열정만 확인 할 뿐이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순간부터 거기에 매료되고 감동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사회곳곳에서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더들리 우드베리박사는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는 왜 과거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순교의 영성’을 낯설어할까.
풍요로운 한국사회에 편승한 기독교
“첫째 한국사회가 더 이상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드베리 박사는 사람들이 교회를 갈급해 하며 모여들었던 시대는 그 사회가 교회보다 더 문화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고 지적하고, 사회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그 무엇(사람들의 필요들)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교회쪽으로 시선을 모았다고 밝힌다.
그 결과, 초기시대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풍성한 경험을 향유하며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요구하던 악한세력과 철저한 대결을 피하지 않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우드베리 박사의 지적에는 교회를 찾는 불신자들은, 처음에는 문화적인 혜택을 받으려는 어느정도 세속적인 욕망을 갖고 있지만 교회공동체 속에서 그것이 복음에 의해 기독교문화로 회복되는 결과를 보인다는 점이 포함돼 있다.
독립군과 그들의 무기류
여하튼 사회가 교회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아진 지금,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삶의 중요한 필요를 충족해 주는 곳으로 생각하는 대신 ‘정신적’ ‘심리적’ 공허감을 달래고 위로받기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생각하게 됐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신앙생활이 매우 관념적인 수준으로 정형화되는 매우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적인 체험을 삶의 변화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믿음의 확신을 생활혁신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순교의 영성을 기대하기에는 우리의 생활환경이 많이 바뀌어 있다는 것이 우드베리 박사의 첫 번째 지적이다.
눈에 보였던 원수가 사라진 혼동의 시대
두 번째는 “눈에 보이던 명확한 ‘적(敵)’이 사라진 이유 때문이다.” 우드베리 박사는 순교의 영성이 충만했던 시대환경에 주목하며 2차대전 전후를 상기시킨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가 인류의 적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었다면 2차대전 후에는 공산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순교의 영성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의 공통점은 이처럼 눈으로 드러난 명확한 적의 개념이 있었다고 하면서 적 혹은 현실 속의 사탄개념이 흐려지기 시작한 현대시대에 들어와 이같은 순교의 영성은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우드베리 박사는 21세기가 말하는 사탄(적)개념은 더 이상 눈에 드러난 체제나 집단처럼 외부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속에 내재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공동의 적(敵)으로 규정됐던 많은 세력들이 사라진 지금, 순교의 영성이 약화되는 객관적인 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순교영성은 신앙의 삶 전과정으로 이해돼야
우드베리 박사의 분석은 매우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가 예의주시할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순교의 영성이 안락함을 추구하는 환경의 변화나 적대적인 감정의 한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현실 삶이 만들어낸 가공의 실체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실체라는 이유 때문이다.
순교의 영성은, 가시적으로는 왜곡된 환경 아래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나라를 꾸준히 지향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라는 ‘과정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이 걸어간 비아돌로로사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가야만 했던 길이었음을 생각하면 순교의 영성은 환경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신앙인 사이의 끈끈한 관계의 극단적 표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할 부분이 있다.
순교의 영성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의 한 과정이라면, 과연 하나님을 지향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왜 이 시대 ‘영성’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매우 원칙적인 사실에는 침묵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참, 거짓 영성은 적어도 눈에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는 참영성 구별안돼
소위 이적과 기사, 마술을 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만을 지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성경은 선지자들의 예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의 체험을 통해서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같은 초자연적인 현상 하나만을 보고 얼마나 그것들을 추종하며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왔던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물론 여기에는 꿈과 환상과 계시도 포함돼 있다.
성경은 또 반복적으로 칭찬을 듣거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영성에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들은 악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언행을 일삼아 그들로부터 칭찬받고 혜택까지 받는다.
악을 못본체하고 옹호하며 감싸주는 일을 사랑이라며 변명한다. 예레미야 5장과 이사야 30장 미가서 2장 등은 거짓영성에 사로잡힌 선지자들의 관행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호서대 임태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난 70-80년대 이같은 사실을 경험했다. 군사독재자들의 불법을 고발하고 저항한 교계지도자들은 공산주의니, 용공주의자니 하는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갔다. 그러나 일부 군사독재자들의 비위를 맞춘 교계지도자들은 이러저러한 감투를 쓰고 표창을 받았다. 두 부류의 지도자 가운데 누가 참 지도자요 거짓 지도자일까?”
여기서 순교의 영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뗄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에 대한 완전한 굴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유지하는 그의 법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법을 무너트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체를 와해하는 일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열방구원을 방해는 일이다.
국가주의 보다 하나님 구원을 먼저 생각하는 영성
우리는 법이 보장한 나라의 주권이 침해받으면 전쟁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법이 무너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법 사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서야 하는 것은 그 나라 백성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교의 영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꾸준한 성경읽기와 기도, 예배와 공동체 속에서의 교제 그리고 그 나라를 증거하는 전도운동 등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하며 살아가는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은 아직까지 죄성이 있는 우리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그것을 완전하고 꾸준하게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한다.
21세기를 주도해야만 하는 한국기독교의 과제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1907년에 일어났던 성령강림 사건을 이 시대 속에서 다시 한 번 체험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적 은사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결속하는 영으로 나타나야 하고 신앙훈련과 교육을 견고하게 다져나가는 일로 드러나야 한다.
세상의 권세에 붙어 기생하는 모든 거짓 영성을 분별하여 선한 영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낱 종교적 관념상의 변혁으로만 그친다면 새로운 교조주의 출현 외에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열과 갈등, 모든 분야의 왜곡을 일으키는 근원적 뿌리인 한반도 분단을 청산하는 통일의 대과업을 이루는 지상과제 수행에 단기적으로 모든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