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조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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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조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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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5.1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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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 목사<열림교회>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karl Barth)는 자신이 쓴  교회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c)에서 이런 말을 했다. “물 속에 넣어진 지팡이는 굴절된 지팡이로 볼 수 있다.”

이미 물 속에 들어간 지팡이는 가시적으로 굴절된 지팡이 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나의 눈에 굴절되어 보인다고 그 지팡이가 굴절된 지팡이는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음악에서 음을 잡아주는 절대음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서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칼 바르트는 기준이 없어 공허하게 된 그 자리에는 다른 것들로 채워 질 수박에 없고 다른 것들이 자리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을 잃어버리고 영적 기갈에 빠진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기보다는 무언가 가득 채워야 한다는 신앙의 조급증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조급증이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향한 순수한 신앙을 변질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왜?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을까?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울타리를 만들고 말았다. 예수님의 곁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왜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 자신을 향해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출애굽의 과정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시내산에 올라갔다. 산 밑에 있던 백성들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모세를 기다리다 아론을 찾아간다. 아론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갈 수 없단다. 무언가 자신들의 정성이 담기고 자신들의 땀이 묻어난 하나님을 자신들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가까이 두고 싶다는 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백성들은 아론을 통해 자신들의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떼어 내어 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경건과 정성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만들고 싶어 했다. 모세를 기다리던 불안과 초조함이 아론이나 백성들에게 신앙의 조급증을 만들어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그 조급증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이 자신들의 눈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한 것이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의 가시적인 영역 안에 담아 낼 수 있는가? 교회라는 그릇에 하나님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 중세 교회의 오류이다. 히브리 백성들은 자신들의 귀한 것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 낸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뛰며 기뻐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싶고 하나님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조급증이 만들어낸 산물, 그게 금송아지이다. 금송아지가 처음부터 우상이지 않았다. 신앙의 조급증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는 우리가 만들어 낸 우상들은 없는가? 그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만족해하지는 않는지 물을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말씀이 아닌 떡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본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비본질적인 것들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이 아닌 대용물들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고는 있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5월 가정의 달에 신앙의 조급증을 버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신앙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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