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멈췄지만 아직도 우리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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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멈췄지만 아직도 우리는 아프다”
  • 김찬현
  • 승인 2005.04.2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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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 둘러본 ‘민통선 평화기행’ 동행취재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멈춰진지 52년째, 2005년인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잠시 멈춰진채로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우리 피부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아직도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머물러있는 민통선. 그 현장으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기획하는 민통선 평화기행단과 함께 떠났다.



한강과 자유로

서울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20분남짓 달린 버스는 어느새 한강변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자유로의 풍경은 분명 서울 한복판에서 바라보던 한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거대하고 살아있는 강이라면 자유로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우리의 현실을 느끼게 해준다. 현실은 우리가 들이쉬는 공기같다. 평상시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공기처럼 전쟁과 분단이라는 현실은 우리 속에서 살아있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막고 있는 철책선은 분단이라는 현실의 아픔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본 북녘

자유로를 달려 40분 정도 지났을즈음. 버스는 오두산에 도착했다. 까마귀 오(烏), 머리 두(頭) 까마귀 머리라는 의미의 오두산.
예로부터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으로 예로부터 서울과 개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도 서부전선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은 460여 미터 가장 먼 곳은 3.2km 거리를 두고 북과 대치해있는 곳이다. 오두산에서 바라본 하늘빛은 남녘이나 북녘이나 똑같이 푸르고 시린 빛이다. 북에서 우리의 하늘을 볼 때도 내가 본 하늘처럼 푸르고 시린 빛일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분단의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여기 오두산 통일전망대인 것이다.



역사의 반복을 보여주는 화석정

일행을 태운 버스는 오두산을 떠나 화석정으로 향했다. 자유로를 벗어나자 도로 바깥풍경은 붉은 흙과 두꺼운 철책으로 채워졌다. 높은 철책 너머에는 북쪽 개성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는 대포들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차를 타고 한시간만 벗어나도 우리의 분단현실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우리 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실재하는 것이다.

화석정은 율곡리에 소재해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아호에서 딴 율곡리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이이선생의 역사가 살아있다. 고려 충신 길재가 살던 터임을 기려 율곡의 5대 조부 이명신이 건립하고 이후 그의 손자 율곡이 증수했다. 율곡은 그의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율곡과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시대를 앞지르는 그의 통찰력을 보여줬던 일화로 ‘10만양병설’이 있다. 조선 선조 때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의 군사를 길러 전란에 대비하자는 그의 상소에 선조는 평화의 시기에 전쟁을 거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의주로 피난길을 오른 선조일행이 어두운 밤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화석정을 태워 불을 밝혔던 일화는 유명하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선조가 이이의 화석정 불빛을 도움삼아 임진강을 건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뼈에 사무치는 후회를 하지는 않았을까?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 유림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의 율곡선생 유적정화작업으로 재복원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준다. 화석정에 서서 바라보는 임진강은 굽이굽이 돌아 서해로 향한다. 율곡은 화석정 정자에 서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빠졌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화석정에서 보이는 임진강의 전경은 지금 한반도의 상황을 뼈져리게 깨닫게 해준다. 화석정을 불태우면서 선조가 건넜음직한 강너머 동파리에는 미 2사단의 포사격장이 들어서 있다. 6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은 지금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언덕을 타고 올라온 차가운 강바람에 봄기운이 밀려난다. 그 찬바람을 맞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아직도 시리고 차가운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직도 전쟁은 계속된다" 장파리 

파주군 장파면 장파리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의 주둔으로 생긴 마을이다. 이 마을이 생길 당시에는 극장이 두개나 있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던 마을이라지만 지금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우리 땅 어느 곳에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지금은 북녘땅이 되어버린 강건너 장단면에 살다가 전쟁이후 이주한 주민들과 전쟁 때 잠깐 살다가 평생 삶터가 되버린 사람들이 이 마을 주민들이다. 농한기가 되면 전 주민이 민통선 안에 있는 미군부대로 들어가 시야를 가리는 풀과 나무를 정리하는 마초작업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지뢰지역인지라 지뢰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곤한다.


철원이 고향으로 다른 장파리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후에 정착하게 된 이덕준 할아버지도 지뢰피해자다. “사고가 난게 79년도 가을이니까 오래됐지요. 여기뿐만 아니라 근처 금파리에도 지뢰 때문에 다치고 죽은 사람이 많아요. 전쟁이 멈췄지만 아직도 전쟁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있어요.”

장파리, 금파리에 살아있는 지뢰피해자만 십수명에 이른다. 문산, 금천, 적성, 철원, 양양, 양구 등 민통선 지역에 위치한 213개마을의 사정도 매 한가지다. 민통선 안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있고, 전쟁의 피해자가 있는 것이다.



통일의 열망이 가득한  자유의 다리

예전에는 자유로를 지나 자유의 다리를 건너 자유의 마을을 통해 자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통일대교를 지나 통일촌을 지나 통일각으로 향한다. 자유의 다리는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다. 폭격으로 2개의 교량이 폭파되었으나 포로들을 위해 임시교각을 세운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자유의 다리이다.

이 자유의 다리 철책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의 소망이 담긴 쪽지들이 무수히 달려있었다. “북한친구야 빨리 통일이 되어서 같이 놀자”라고 적은 유치원 아이의 글부터 가족과 고향을 북에 두고온 이들이 남긴 쪽지들이 통일의 열망을 보여준다. 이들의 열망이 언젠가는 저 막힌 담을 넘어 이 땅에 평화를 불러올 것이다.



‘민통선 평화기행’. 민통선과 평화라는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한다. 민통선은 아직도 전쟁이 한창이고 이 땅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요원해보인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분단’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온하다. 너무 평온해서 우리가 처해있는 분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다.

함께 동행한 문선경 권사(창천감리교회)는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어요. 정치적인 통일보다도 마음에서부터의 통일을 이뤄야한다는 걸 알았어요.”라며 민통선 평화기행을 다녀온 소감을 이야기한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통일이 이뤄진다면 민통선이 사라지고 이 땅에 평화가 오는 날, 하나의 민족이 되는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다시 손을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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