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모여 사는 사랑의 공동체 - 신망애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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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모여 사는 사랑의 공동체 - 신망애복지재단
  • 승인 2001.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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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쉴 곳이 있어 우리는 너무 행복합니다”

오랜 고통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외면 당하고 가슴 깊은 상처로 아파해야 하는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 위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몸 성한 사람들의 못마땅한 시선과 멸시를 견디며 구걸하는 것보다 부족한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훨씬 행복했다. 입에 풀칠만 겨우 하며 살지라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상 한가운데서 모진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 맘이 편했다.

이곳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신망애복지재단(대표:김양원목사). 어린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정신장애인,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몸을 맡긴 지체부자유자들이 유유히 거닐며 평화를 만끽하고 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귀찮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지 않아서 일까. 훈훈한 미소와 여유가 있을 뿐 불평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저희 모습이 좋아 보입니까? 지금까지 신망애의 역사는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소아마비 장애인인 김양원목사는 젊은 시절 거지나 다름없는 장애인들을 찾아 지하철로 육교로 전도하러 다녔다. 그러나 자신의 못쓰는 다리를 보여주었는데도 그들이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장애인들에게는 당장 먹을 것과 잠잘 곳이 필요했다. 복음은 그 다음이었다. 김목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종암동 월세방으로 거리의 장애인들을 데려와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목사의 장애인 가족이 10명이 되고 20명이 되며 신망애 공동체는 문을 열었다.

“이는 배고픈 삶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5년간 하루 세끼 제대로 먹은 적이 없어요.”

이 땅에는 왜 이리도 장애인들이 많은지 공동체에는 어느새 1백여명의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끼니를 잇기 위해 주위의 공장에서 누룽지를 받아 끌여 먹기도 했다. 태릉 지역에 살 때는 근처 군부대에서 버린 음식을 주어 담아 먹으며 살았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 주민들도 더럽고 냄새나는 천한 사람들이라 여기며 자기 동네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신망애 공동체는 쫓기듯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서너 차례는 정 붙일 수 없는 곳으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 구리시 갈매동에 다다랐다. 신망애 가족들은 잠자리에 누우면 별이 보이는 축사를 개조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하찮은 비닐하우스였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단순 작업 및 기술 교육 등으로 자립 의지를 키워 나갔다. 한쪽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 조감도를 그려 놓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도록 매일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의 장래를 위해 안정된 삶의 터전을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는 정반대로 현실은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비참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실 때처럼 하나님은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삶의 터전인 비닐 하우스에 화재가 발생, 지난 10년간 장만한 모든 살림살이와 가재도구, 휠체어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삼켜 버린 것이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신망애 가족들이 모두 목숨을 부지한 것이 그나마 감사할 일이었다.

신망애 가족들은 더 이상 그 곳에서 살 수 없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온 소방대원들도 멀리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을 뿐 물을 뿌릴 생각을 않고 있었다. 비닐 하우스 철거 명분을 찾고 있던 구리시의 지시 때문이었다. 신망애 가족들이 어렵게 새로 집을 지을 도구를 마련해 왔지만 전경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또다시 쫓겨나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있던 사회복지원을 임시 거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축복이 되고 전화위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리 터를 닦아 놓게 하고 약속의 땅으로 삼으셔서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옮기신 것 같았다. 6개월 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사회복지원 원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김양원목사에게 사회복지원을 위임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신망애 가족들은 그들이 기도했던 그대로 빨간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매일매일 모든 가족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도 여전히 쉬지 않고 있다. 정부보조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이지만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신망애 가족들은 ‘노인 그룹홈'을 운영해 주변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돕고, 그들을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을 여러 사람과 나누기 위해 ‘신망애노래선교단'을 조직하는 등 이웃과 함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는 자신에게 장애가 있어도 누군가를 도와주며 산다는 자부심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돕고 살았다면 이런 복지재단은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정상인들의 의식이 바뀌고 장애인들의 고통이 해소 될 때까지 이 사역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김양원목사는 신망애 가족들을 바라보며 장애인선교가 그리스도인 모두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고백했다.

구자천기자(jcko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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