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특집:소멸위기 역사사실로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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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특집:소멸위기 역사사실로의 부활
  • 윤영호
  • 승인 2005.03.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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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의미만 강조되고 육체부활의 역사성은 퇴색


기독교 최대절기인 부활절이 각종 이념과 이슈 속에서 본래 의미가 퇴색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사회전반에 뿌리내리며 ‘사실 자체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존중받는 시대’를 맞아 부활에 대한 초대교회의 증언마저 변질될 상황이다. 몸의 부활을 증언하는 성경의 메시지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사실자체 보다 ‘구속의 의미’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회복’ 등 관점에 따른 해석과 의미부여로 채색되고 있다. 초자연의 ‘몸 부활’을 증언한 초대교회의 담대함이 절실한 때다.



요즘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가 쓴 책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의사 출신이면서 신학자요 설교가인 그에게 특별히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는, 복음의 원칙을 용인하는 교회들이 갈수록 감소하는 시대를 꽤 강도 높게 비판하는 그의 강직함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몇 년 전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후원으로 복음주의의 본질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복음주의’를 주제로 강연하게 된 배경을 유다시대(AD.70년 이후)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도 유다같은 이들이 처했던 상황과 아주 흡사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믿는다. 믿음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전체를 방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으로 돌아가서 기독교신앙의 본질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변호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창궐하는 영지주의가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상황에서 유다는 ‘구원교리’를 설파하기보다 ‘믿음의 본질’을 재점검하며 신앙공동체를 굳게 세우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까닭에 로이드 존스는 다양한 사조 속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당하는 위협의 시대를 ‘복음주의 재점검’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자체보다 사실로부터 파생한 의미적용에 시선을 고정시킨 최근 한국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자칫 ‘몸의 부활’이라는 본질을 약화시킬 가능성마저 있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2005부활절을 전후해서 특별히 한국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최근 강하게 뿌리내리는 다원주의 경향의 독소 때문이다.


이같은 경향에 대해 문상철 원장(한국선교연구원,KRIM)은 “모든 것을 관점에 따른 해석의 문제로 여기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는 역사도 허구로 간주되어 그 진정성을 잃고 만다”면서 “초자연적이고 무오한 영감과 계시를 부정하면서 주관적인 독자중의 해석만을 중시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영향 `무방비`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다원주의 결과가 절대진리로 천명된 ‘몸의 부활’조차 ‘해석된 역사’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문 원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몸의 부활로 압축되는 기독교 절대진리가 흐려지는 상황에서 종교간 대화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는 “성경적 기독교세계관은 배타주의나 특정주의를 표방하므로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관용과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며 “문제는 종교간의 평화공존이 아니라 진리”라고 강조했다. 역사적 사실보다 해석을 존중하는 이 시대의 경향은 뚜렷한 진리자체를 상대화시킴으로써 비본질을 본질로 둔갑하도록 허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난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성찬예식

또 하나, 올해를 기점으로 ‘몸의 부활’을 강조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고난만을 강조하고 있는 ‘성찬’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이에 대한 유해무교수(고신대)의 생각은 이렇다.


“한국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불균형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찬이 그 예이다. 초대교회는 성찬식 때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기도를 먼저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부활하신 날에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돼 있다. 성찬에는 부활과 부활의 주님이 중에 서 계시는 것이다.”


포도주와 떡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피와 살은 성찬예식을 통해서 고난의 증표로만 인식될 뿐 부활의 피와 살로는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것이 우리 예배의 현실이다.

이같은 경향은 기독교 최대절기로서 부활절의 감격을 반감(半減)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믿는 몸의 부활과 앞으로 나타날 그리스도의 재림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역사적 사실로서 부활과 재림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우려들이 그것이다.

유해무교수는 초대교회의 성찬이 슬픈 예식이 아니라 ‘즐기며 기뻐하는 예식’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부활과 재림을 체험하는 성찬식을 통해 교인들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역사사실 보다 의미와 해석만 통용되는 시대
몸의 부활이 강조돼야 할 오늘날의 상황은, 사실 초대교회의 상황과 자못 흡사하다. 신약이 기록된 AD. 50-90년 사이 소아시아지역은 로마와 헬라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여서 죽은 자의 부활신앙을 영혼불멸성이라는 철학적 바탕 위에서 이해했었다. 즉 몸은 사멸되고 영혼만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성’이 보편적으로 주장된 시기였다는데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혼불멸성이 강조되던 그 시대에 초대교회 공동체가 증언한 ‘몸의 부활’은 당시의 헬라문화권에서는 매우 독특하고 튀는 주장이었다.

특별히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의 철저한 영육 이원론이 기승을 부렸던 시대 속에서 초대기독교 공동체가 증언한 몸의 부활은, 기독교 공동체의 증인역할을 한층 고무시킨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이것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저변에 깔린 현대인의 생활 속에 ‘몸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나 헬라철학이 보편적으로 용인되던 시대에 ‘몸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비록 시대배경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몸의 부활’이 용인되기에는 척박한 환경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무비판 수용되는 해석된 역사들
유감스럽게도 1천만 기독교인 탄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보유한 한국기독교의 풍성한 환경에서 조차 그리스도의 몸 부활 사건은 현대의 여러 사조 가운데 가장 교묘한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밀려나 ‘해석된 사건’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실정이다.


초대교회는 십자가 사건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모두를 동시적으로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며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증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왔다.

이 증인들은 부활사건에서 머물지 않고 ‘마라나타’(고전16:22)라는 기도문을 애송한 것으로 전해진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역시 실제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상철 박사는 갈수록 뒤틀려지는 시대상황을 빗대며 이렇게 주장한다.


“18세기의 경건주의보다도,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학문성보다도, 16세기의 종교개혁 가르침보다도,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교회들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공동체들이 될 때 부활의 복음은 힘차게 선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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