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김경종목사 1894-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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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김경종목사 1894-1950
  • 윤영호
  • 승인 2005.01.1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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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구국신앙 이어 한국전쟁서 순교
 

3.1운동 가담 혐의로 고문…6.25 때 공산당에 순교   

1894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한 김경종목사가 목회자로 사역키로 마음을 굳힌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지난 1929년경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1907년 이후 꾸준히 계속된 북한지역의 성령부흥운동이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하는 것이 추측이다.


늦은 나이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김경종은 졸업 직후 함남 혜산군의 혜산교회에서 봉직했다. 혜산교회는 1916년에 설립돼 수년간 신마리아가 시무한 곳이다. 신마리아는 기독교여성운동가로 최초 여성의학박사요 사회사업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 연동교회 최초 여집사로 이름을 남겼다.


김경종목사는 혜산교회 이후 함남 함흥의 운홍리교회에서 시무했고, 이어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1934년 경 도쿄 아오야마신학교를 졸업, 1940년 장로교함남노회장에 피선돼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의 역경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됐다. 지도자 자리에 오른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 3.1운동 가담자로 지목돼 가혹한 고문과 수형생활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됐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동방요배 반대 등 그는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독립과 우상숭배 반대대열에 합류했다. “천황도 다 똑같은 피조물로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 새로운 세계를 안겨주지는 못했다. 김경종목사는 공산당의 압박을 피해 남하했지만 불과 수개월 만에 터진 한국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울 후암교회에서 시무한 김경종목사는 6.25발발 직후 가족들을 모두 피난시켰으나 정작 자신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산당에 피랍, 후퇴하는 길에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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