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나이에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감리교 목사로 조국의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드는 등 적극적 애국신앙운동의 모델로 오르내리는 남천우목사(호 일포一包)는 강원도 홍천출신으로 기독교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십자가당’을 구성했던 인물이다.
남천우목사는 그의 나이 26살에 세례를 받고 직후에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결단력과 담대함 그리고 애국신앙으로 뭉쳐져 있었다. 젊은 나이에 지독한 경험으로 경륜을 쌓은 그가 30년대 경 남궁 억 선생과 교분을 맺으며 바뀐 점은, 혼자의 힘이 아니라 조직화된 힘의 필요성을 비로소 느꼈다는 사실이다.
1931년 강원도 홍천지방 감리사로 피택된 남목사는 남궁 억 선생과 교분을 쌓은 지 1년만인 1932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십자가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 활동했다. 기독교적인 진리의 실현을 전제로 하여 조국과 민족을 압제로부터 구하자는 뜻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당시 뜻을 함께한 20여명의 성도들은 춘천기독교여자관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합하고 ‘기독교 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강을 초안,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십자가당이 주로 하는 일은 공식 비공식 종교집회를 열어 농촌지역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신앙을 불어 넣는 것이었다. 소위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십자가당의 핵심사업이었다. 하지만 십자가당은 불과 1년 만에 일제에 의해 발각됐고 무수한 지도부들의 검거로 흩어지고 말았다. 남목사도 이 일 때문에 지독한 형무소 생활을 3년동안이나 보냈다.
해방 후에도 그는 자각운동의 선두에서 복음전도와 함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미군정청과 협조, 충남지역 고문으로 위촉될 정도였다. 그는 대전감리교회를 설립는 등 목사로서의 본분일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도하는 한편 58년에는 민주당 중앙위원으로 위촉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낙향해서 살다가 69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난 77년 정부는 남천우목사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정부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