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와 가우처의 만남, 한국 선교의 길 열어
미감리교 파송 첫 공식 선교사 ‘매클레이’ 조명
1884년 6월 23일, 미국 감리교 파송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조선에 최초로 합법적인 선교사 신분으로 입국했으며, 한달 뒤 고종 임금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중심의 선교 윤허를 받았다. 그는 1년 뒤 입국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지원하면서 한국 선교의 산파 역할을 감당했다는 평가다.
감리교회는 매클레이가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은 1884년 7월을 기점으로 올해를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으로 기념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감리교회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 8일 종교교회(담임:전창희 목사)에서 ‘고종 황제 선교 윤허 140주년 기념 학술제’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제에서는 감리교 선교 전개의 순서에 따라 가우처와 매클레이 선교사를 조명하고 고종의 윤허사건을 다뤘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서영석 교수(협성대)는 동아시아 선교의 개척자로서 한국 선교의 첫 길을 연 매클레이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조명했다.
서 교수는 “매클레이 선교사는 고종의 허락을 받아 입국한 공식 선교사로서 그를 통해 한국 개신교 선교가 처음 시작됐다. 이후 그는 내한 개척 선교사들의 모든 선교 과정을 지도하고 후원하면서 한국 선교의 산파역할을 맡았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매클레이 선교사는 젊음과 일생을 개척 선교에 다 바치면서 끝없는 시련과 고난의 여정을 감내했다. 본국에서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는 환경을 내려놓고, 조선에 들어와 아내와 자녀를 잃는 슬픔도 이겨내야 했다”며 매클레이 선교사의 헌신적 삶을 전했다.
한편 매클레이 선교사가 조선에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가우처 목사(John F. Goucher, 1845~1922)의 권면이 있었다.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사절단으로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를 만난 가우처 목사가 조선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로 조선 선교를 제안했다. 그는 미국 감리회 해외 선교부에 조선 선교를 요청하고 5천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가우처 목사에 대해 소요한 교수(감신대)는 “한국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시초가 될 뿐 아니라, 선교를 지속시켰던 인물로서 감리회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켰다”고 소개했다.
당시 볼티모어 러브레인교회의 목사인 가우처 목사는 조선 후기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한 1883년 보빙사의 미국 방문에서 극적 만남을 통해 한국 선교를 타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소 교수는 “기차에서의 가우처 목사와 보빙사의 만남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을 그전부터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었고, 보빙사의 미국 방문과 경로가 노출된 상황에서 보빙사와 가우처 목사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그는 감리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보방사와 가우처 목사의 만남을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에서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가우처-매클레이-김옥균-고종’을 따르는 이들의 갈래가 개신교 전래의 토대를 마련했고,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토대 위에 이러한 노선이 ‘알렌-민영익-고종’으로 대체됐다는 점이다.
논찬을 맡은 장성배 교수(감신대)는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본 감리교 선교’라는 제목으로 “1880년대 한국 선교의 시작은 단순한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큰 섭리와 계획 속에 이뤄진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감리교회의 선교 역사를 통해 한국 기독교 선교를 위해 모든 과정을 준비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선교를 위해 세계의 흐름을 바꿔가고 계시며, 그의 선교 역사에 동참할 이를 부르고 계신다”며 “감리교회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서로 협력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