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와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교파를 초월해 연합했다. 선교사들은 교파 의 차이로 인한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교파마다 선교 구역을 정해 사역할 정도였다. 이는 아름다운 연합 전통의 시작이었다. 그 연합은 성경 및 문서 번역으로까지 이어졌다.
1890년 대한기독교서회가 조선성교서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될 때 감리회, 장로교가 그 주축이 됐다. 빈톤 선교사의 집에 임시 사무소를 차렸으며 감리교 올링거 선교사와 감리교 헐버트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연락 간사는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서기에 감리교회 스크랜튼 선교사, 회계는 캐나다 선교부의 펜윅 선교사가 담당했다.
회장을 맡았던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 젤러는 1888년 삼문출판사를 설립하며 기독교 문서 출판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하나의 교파의 힘은 부족하다고 여겨 연합해 문서의 번역과 출판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운영진 구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운영 면에서도 선교사들은 화합을 선택했다. 서회 참가 교단은 각자 출자해 직원들의 사례비를 지불했다. 또한, 편집부에 한 명씩 전임으로 번역 및 검수 업무를 했다.
특히 최초로 연합예배가 서회를 통해서 드려졌다. 서회 운영진들은 총회를 열고 1912년 1월 셋째 주일부터 서회 주일을 정해 헌금과 기도하는 것을 결의했다. 이는 우리나라 연합기관이 최 로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는 시초가 됐다.
또한 1931년 온전한 서회 건물을 갖게 됐을 때, 서회는 다른 기독교 기관과 건물을 함께 공유하는 결단을 내렸다. 감리교 총리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아이생활사, 기독신보사, 신생활사 등에게 건물 입주를 허락해 함께 사용했고 이 때문에 서회 건물은 ‘조선기독교 운동의 총본영’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경과 문서 출판뿐만 아니라 흥이 많고 찬송에서 많은 은혜를 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교파마 다 달랐던 찬송가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892년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를 발간했다. 안타깝게도 후에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각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2006년 ‘21세기 찬송가’를 다시 제작함으로써 다시 한번 한국교회의 연합에 기여했다.
이처럼 현대에 와서도 대한기독교서회의 연합 활동은 활발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 △구세군 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회원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