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배우면 하루 사람 노릇하고, 일 년을 배우면 일 년 동안 사람 노릇한다.”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 나오는 말입니다. 홍대용과 함께 김원행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주도이(周道以)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입니다. 주도이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후손으로서 평생 진리를 좇으며 살겠다는 뜻을 담아 그의 이름을 道以(도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조용한 성격에 말수도 적었고, 허약한 체질이어서 병을 달고 살았는데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으며 명예와 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선의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었던 그는 중국 북경에 가서 4년 동안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익혔는데 돈도 없고 후원자도 없었던 그는 풍찬노숙의 생활로 인해 몸이 더욱 망가져 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국내로 돌아와 고향에 잠시 들른 후 석실서원으로 들어가 더욱 공부에 정진하였으나 그만 병이 깊어져 아내의 뱃속에 자식이 있음도 알지 못한 채 서른 살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홍대용은 아픈 가운데도 아침저녁으로 글을 읽는 그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가 그 꿈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다음과 같은 애사(哀辭)를 지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배움 때문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고, 군자는 몸이 마치도록 남에게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미워한다고 했다. 하루를 배우면 하루를 사람 노릇 하고, 일 년을 배우면 일 년 동안 사람 노릇하는 것이다. 저 나이 팔십이 되도록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자가 무엇이 귀하다 하겠는가?”
오늘날 성도는 무엇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며 사모해야 할까요?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말씀합니다.
박완서의 소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1972년작)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나’는 진창길을 긴 치마에 고무신 차림으로 나선다. ‘나’는 ‘발을 빨아들여 도무지 놔 주려 들지 않는’ 진창길 때문에 고생한다. 천신만고로 발을 빼면 영락없이 고무신은 진창 속에 남게 마련이다. 다시 고무신 속에 발을 넣어 끌어올리자니 그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진창길 속 고무신 차림과 뭐가 다른가.”
롱펠로우의 시, 〈비 오는 날〉에서는 “슬픈 마음이여! 한탄하지 말라”고 노래합니다.
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 그대 운명은 뭇 사람의 운명이러니 /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3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란 예로부터 “궂은 일이 아홉”이라고 얘기합니다. 삶이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맑은 날도 있지만 비오는 날이 많은 게 사실이 아닌가요? 구름 뒤에 태양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소”라는 가수 김종환의 노랫말처럼 , 그리고 인생을 살다가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를 때, 바로 그때,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한주를 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타는 목마름과 같은 갈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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