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제578돌 맞는 ‘한글날’…여전히 ‘성인 비문해인구’ 존재
35년간 ‘한글교육’ 도림교회, 서울시학력인정문해교육기관 지정
성도들 장기근속 교사로 섬김…어르신들 인생 기쁨, 자신감 회복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선생님의 낭독에 맞춰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예쁘게 깎은 연필을 손에 쥐고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간다. 아직은 삐뚤빼뚤한 글씨에 엉성한 맞춤법이지만 받아쓰기에 임하는 할머니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최근 기자가 방문한 서울 도림교회에선 늦깎이 학생들을 위한 ‘한글수업’이 한창이었다. 평생 제 이름 석자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해 온갖 불편과 설움을 겪었다는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용기를 내 한글을 깨우친 뒤 깜깜했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연신 감사를 고백한다.
올해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로 578돌을 맞는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바. 한국의 ‘문맹률’도 1%대로 전 세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엔 여전히 글을 알지 못해 남몰래 가슴앓이하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도림교회의 ‘비전한글학교’는 이런 성인 비문해자들을 지난 35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왔다. 서울시 교육청이 선정한 학력인정문해교육기관인 비전한글학교는 “글을 몰라 일생을 죄지은 사람처럼 살았다”는 어르신들에게 배움을 넘어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준다.
상처 치유하는 한글수업
동사무소에서 내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간단한 은행 업무를 보는 등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가파른 산봉우리를 넘는 것 같은 험난한 여정일 수 있다. 소싯적 남편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노점상을 꾸리며 세 자녀를 장성하게 키운 엄기임(82) 할머니도 그랬다.
그동안 먹고 사느라 한글 교육은 엄두도 못 냈다는 그가 비전한글학교에 온 까닭은 ‘성경책을 보고 싶어서’였다. “교회를 40년 다녔는데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90세 권사님이 성경을 줄줄 읽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밤 펑펑 울었습니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아들의 권유로 천천히 한글을 익혀가고 있다는 엄 할머니는 “언젠가는 내 힘으로 성경책을 읽는 게 소원”이라며 “허리가 좋지 않아 수업 도중 몇 번씩 서서 교실을 왔다갔다 해야 하지만 몇 년이 걸릴지라도 즐겁게 공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년시절 동생들을 돌보느라 교육의 기회를 놓쳤다는 지정분(74) 할머니도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인생의 활력과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늘 부끄럽고 주눅 들어 있었던 제가 이제는 스스로 일을 처리하고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도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웃어 보였다.
1989년부터 도림교회 디아코니아센터가 운영해온 비전한글학교엔 이처럼 다양한 사연을 지닌 어르신들이 문을 두드린다. 학습자 대부분은 60세 이상 어르신들이다. 불우한 가정형편과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초등학교는커녕 한글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르신들 중엔 경기도와 천안 등 1시간 이상 먼 거리를 달려오는 분들이 많다. 각 지역마다 문해교육기관이 있지만, 이제껏 자신이 문맹자란 사실을 숨겨온 이들이 지인들의 눈을 피해 일부러 낯선 타지로 오기 때문이다.
도림교회의 비전한글학교는 2011년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학력인정문해교육기관’으로 지정됐다. 학습자들은 3단계에 걸쳐 총 120주 720시간을 이수하면, 별도의 검정고시 없이도 교육부장관이 인정하는 초등학력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도림교회 목회총괄 양태왕 목사는 “‘문해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글자를 가르치는 데서 나아가 학습자들이 마음에 맺힌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자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며 “한글교육은 모든 교육의 토대이자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다. 전도가 목적은 아니지만 ‘선교적인 마인드’로 동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발에 만끽한 학창시절
현재 비전한글학교에서 수학 중인 어르신은 매년 50여명에 달한다. 학비도 무료여서 한해 200명이 지원할 만큼 수요가 높았다. 세심한 관리를 위해 각 반은 10명 남짓의 소수 정예로 구성한다. 국영수사 과목을 비롯해 다양한 창체활동이 이뤄지는 점도 눈길을 끈다.
뿐만아니라 입학식, 반장선거, 소풍, 체험학습, 운동회, 수학여행 등 비전한글학교는 흡사 ‘작은 학교’를 방불케 한다. 교복을 차려입고 합창제에 참여하거나 KBS ‘골든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잊지 못할 추억도 쌓았다.
덕분에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어르신들은 그토록 갈망하고 꿈꿨던 학창시절의 재미를 백발의 나이가 돼서야 누려본다. 모든 문해교육을 수료하면 서울시가 주관하는 ‘초·중등 학력인정문해교육 이수식’에서 교육감 명의의 졸업장도 받는다.
비전한글학교가 긴 시간 명맥을 이어온 배경에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과 봉사라는 목회비전에 공감한 성도들의 따뜻한 후원과 자발적인 헌신이 녹아있다. 도림교회 성도들은 목적헌금을 통해 비전한글학교를 지원했고, 선뜻 ‘교사’를 자원하며 재능기부를 실천했다.
지금은 5개 반에서 10여명의 교사가 근무 중이다. 이들의 근속연수는 대개 최소 10년에서 길게는 30년을 훌쩍 넘는다. 어느덧 16년째 비전한글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제숙희 권사도 그중 한 명이다.
매주 두세 차례 꼬박 시간을 내는 게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배움에 목마른 어르신들을 보면 비전한글학교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는 그는 “수업 때 조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정말 열심이다”라고 귀띔했다.
이어 “자존감이 낮아진 어르신들이 무심코 던진 저의 작은 말에 혹여 상처받지 않도록 늘 기도로 임한다”며 “경제적 여건이나 건강 등 여러 사정으로 학습을 중도 포기하는 어르신들이 가장 안타깝다. 반면 밝고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어르신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한글, 세상을 잇는 통로
‘어려서 학교 못 가고 죽을 만치 일만 한 고생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진즉 왔어야 했는데. 학교도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고맙다. 공부는 말로 표현 못 할 즐거움이다’(김수경 할머니 作).
비전한글학교 교실 입구엔 글을 깨우친 후에야 비로소 기록한 인생의 여정과 심정이 녹아있는 어르신들의 자작시가 전시됐다. ‘인자는 공부하며 세상을 신명나게 살고 있어요’(박남열 할머니 作), ‘고생 바가지가 복 바가지가 됐다’(신연옥 할머니 作)는 구절을 보노라니 가슴이 뭉클했다.
실제로 비전한글학교를 수강한 어르신들의 삶엔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도림교회 디아코니아센터 양혜직 총괄팀장은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이 어르신들에겐 새로운 세상이 됐다”며 “한글을 배우면서 자신감이 붙고 삶의 질이 높아진 어르신들의 얼굴이 화사해졌다”고 강조했다.
어르신들은 백일장 등 각종 대회에도 출전하며 최선을 다해 실력을 뽐낸다. 비전한글학교는 매년 ‘문집’도 발간해 소중한 추억을 선사한다. 문집엔 글을 몰라 고개 숙이고 침묵해야 했던 어르신들의 심경과 한글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 이야기가 생생히 담겨 감동을 자아낸다.
양혜직 팀장은 “일련의 활동을 통해 ‘세상에 글 모르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위축됐던 어르신들이 위로와 도전을 얻길 바랐다”며 “어르신들이 단 한 줄이라도 자신의 마음과 지나온 삶을 글로 표현하면서 평안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러면서 “갈수록 우리나라의 문맹률과 비문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글을 몰라 힘겨워하는 이들을 교회가 끝까지 섬기겠다. 한글은 할머니들이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통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