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 “세상 모든 보화보다 귀한 ‘선교’…육체의 가시 안고도 좁은길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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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세상 모든 보화보다 귀한 ‘선교’…육체의 가시 안고도 좁은길 걸어요”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4.09.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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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페이스미션’ 대표 김태훈 선교사 

억대연봉 의사 생활 접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결단
파킨슨병에도 에티오피아에서 보건의료 강화 힘써
청년 집회 ‘미션 에티오피아’ 개최해 현지인 제자화 

 

김태훈 선교사는 파킨슨병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땅에 남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김태훈 선교사는 파킨슨병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땅에 남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나님은 저의 손에서 ‘메스’를 가져가시고 ‘복음’을 쥐어주셨습니다.” 미래가 촉망받던 대형병원 외과의사였지만 12년 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사명의 땅 에티오피아로 떠난 김태훈 선교사의 사도행전적 고백이다. 그에게는 늘 두 가지 질문이 따라붙는다. 먼저 “당신은 왜 의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갔는가?” 그리고 “몸이 힘든데 왜 계속 그곳에 남아있는가?”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선교사는 파송 2년차에 갑작스레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무서운 질병 앞에 선교 의지가 꺾일 법도 했지만, 그의 열정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 남수단과 에티오피아에 최초로 파견한 전문의로서 현지 보건의료 체계 강화에 구슬땀을 흘린 그는 현재 ‘페이스 미션’(PACE Mission) 대표로 복음사역에도 열심이다. 

최근 약을 타기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한 김 선교사를 만났다. 원인도 모르고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파킨슨병으로 인해 그의 걸음걸이와 말투는 어색하고 불편해보였다. 그러나 육체의 가시를 안고도 좁은 길을 걷는 그의 얼굴에는 평안이 가득했다. 마지막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싶다는 김 선교사의 은혜의 여정을 들어보았다. 

선교의 부르심에 순종  
김 선교사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재원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간담췌외과 임상강사, 서울아산병원 소아외과에서 촉탁 임상교수를 지냈다. 만약 한국에 계속 남았다면 의사로서 상당한 부와 명성을 누리며 성공 가도를 달렸을 테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누구나 선망하는 성공과 안정적인 삶을 마다하고, 2013년 온 가족과 함께 훌쩍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의과대 재학 시절 복음을 깊이 깨달은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학생 때 제주도로 아웃리치를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배 중 찬양을 드리는데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예수님께서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날 이후로 김 선교사의 가슴 한 켠에는 늘 거룩한 부담감이 자리했다.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그의 삶 또한 송두리째 변화됐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몰리는 대학병원에 근무하면서 주일성수조차 지키기 힘들었던 김 선교사의 가치관이 뒤집어졌다. 

“이전까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고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이 인생 목표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성경을 봤는데 누가복음 22장 27절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란 말씀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김 선교사는 한치의 미련 없이 사직서를 냈다. 주위의 반대는 심했다. 여러 대학병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지난했던 수련이 끝나고 이제 편해질 시기인데 아깝다”며 “커리어를 더 쌓고 선교는 나중에 헌신해도 늦지 않다”고 말렸다. 

그러나 김 선교사의 결단은 확고했다. “저는 나이가 들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10년쯤 지난 후에는 제게 선교하러 갈 영성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선교가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귀하고, 선교지는 그 어떤 자리보다 값졌다는 김 선교사. 그렇게 억대연봉에 잘 나가던 대학병원 의사를 하루아침에 그만 둔 그는 ‘의료선교’를 결심하고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 주관하는 남수단 사업에 지원해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남수단에 발을 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닥쳤다. “말라리아를 정말 심하게 앓았어요. 회복되는 데만 2개월이 넘게 걸렸을 정도였죠.” 문제는 그날 이후로 차츰 발이 아파오고 손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말라리아 후유증으로만 여겼다.

아픔을 참아가며 사역을 지속한 김 선교사는 남수단에 내전이 터지면서 2014년 에티오피아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해 잠시 한국에 들러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파킨슨병이었다. 선교하러 간지 불과 1년 3개월만에 생긴 일이었다.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도조차 못 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다. “어느날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어요. 잠깐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비가 쏟아져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저는 파킨슨병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는데, 하나님은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아내 김희연 사모에게도 친히 찾아오셨다. “아내도 실신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기도 중에 환상으로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답니다. 가시덤불 위를 걸으시던 예수님의 발은 피투성이었죠. 그때 아내 역시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그 분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누리는 것’임을 깨달았답니다.”

마음을 다잡은 김 선교사 내외는 마침내 에티오피아에 남기로 결정했다. “하루는 하나님께 ‘제가 깨어진 그릇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네가 깨어졌기에 너를 택했단다’고 응답해 주시는 거예요.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태훈 선교사와 아내 김희연 사모, 그리고 세 자녀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당시.
김태훈 선교사와 아내 김희연 사모, 그리고 세 자녀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당시.

사명의 땅 에티오피아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퇴직하고, 1년 반가량 준비를 거쳐 2013년 아프리카에 당도한 김 선교사. 첫 선교지 남수단을 거쳐 에티오피아에서 그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 최초로 파견한 보건의료 전문의로 근무하며 정부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말이 최초지 지원자가 저밖에 없었다”며 “그만큼 열악한 현지 환경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3년 말 남수단에서 심한 내전이 발발했어요. 마을 하나를 청소하는 종족전이었기 때문에 무척 위험했고, 에티오피아로 터전을 옮겨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김 선교사는 ‘보건의료’ 증진을 위해 힘썼다. 그 일환으로 모자보건사업, 병원운영 및 건강보험 컨설팅, 의료기기 관리체계 역량강화사업, 선천성 어린이 심장병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김 선교사는 “한마디로 에티오피아의 보건의료 역량을 강화하는 게 임무였다”며 “한 명의 의사 역할보다 저개발 국가의 보건의료 시스템 개선을 목표로 삼았다. 에티오피아는 중앙집권적이고 통제가 심해서 NGO보다 국가기관에 속해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최빈국으로 꼽히는 에티오피아에선 보건소인데도 의사가 없고 수도와 전기가 안 나올 정도”라며 “마을이 협소해 구급차 진입도 어려울뿐더러 한번 보건소에 방문하려면 3시간을 걸어야 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의료재정부터 의료인력, 의료기기, 의료인프라 등을 지원하는 일에 힘쓴 김 선교사는 정부기관장 신분으로 직접적인 복음 활동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현지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로부터 “성경 말씀을 나눠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큰 보람을 느꼈다. 

물론 김 선교사와 가족들의 에티오피아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세 자녀의 부모로서 수도도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 가족은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 웃어보였다. 

한편, 김 선교사는 지난 2018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을 사직했다. 자비량 선교사로서 앞길이 막막할 법도 했지만,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신 것처럼 그의 가정을 전적으로 책임지셨다.  

이후 하나님은 새 길을 여셨다. 미국에서 안식년 기간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한 그는 2022년 선교사 네 가정과 연합해 ‘페이스 미션’을 세우고, 에티오피아 청년들의 제자화에 뛰어들었다. 의료선교사였던 그가 이제는 온전히 복음사역에 몰두할 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에티오피아의 교회와 지체들을 일으켜 주변 나라와 북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 등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에티오피아의 헌신자들을 훈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에티오피아 교단과 교회가 자체적으로 선교를 파송하길 꿈꿉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춰 동행하자는 의미로 이름을 ‘페이스 미션’으로 정한 그는 지난해 선교 동원 청년 성령집회인 ‘미션 에티오피아’를 개최했다. 엄청난 수는 아니지만 첫 집회에 80여명의 청년이 참석해 눈물로 뜨겁게 예배를 드리던 당시를 김 선교사는 잊지 못한다.

그는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지역 중심부에 위치해 소말리아 등 여섯 나라와 접경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인이 아니면 입국조차 힘든 이 나라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다. 저들에게 에티오피아 교회의 2천만 성도들은 복음을 전파할 ‘희망’”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심각한 내전으로 고통받는 에티오피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길 소망한다”며 “가난한 나라지만 금과 은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만 증거하려는 에티오피아 크리스천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더 뷰티풀 게이트 처치’(미문교회) 개척을 준비 중이라는 김 선교사는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했다”며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께 저의 삶 전체를 드리고 싶다. 마지막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2023년 4월 '미션 에티오피아' 집회 현장.
2023년 4월 '미션 에티오피아' 집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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