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이 최고일 것 같다. 책을 이토록 열심히 읽는 나라가 또 있을까?”
조선 사람들의 지식 욕구를 잘 설명한 찰스 빈튼 선교사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글귀다. 의료 선교사로 내한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던 제중원의 원장을 역임했던 빈튼 선교사는 조선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열망을 발견했다. 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과 함께 ‘대한기독교서회’ 창립의 주춧돌이 됐다.
장로교 감리회 등이 힘을 모아 1890년 6월 25일 대한기독교서회를 설립했다. 최초에는 ‘조선의 거룩한 가르침의 모임’이라는 뜻의 ‘조선성교성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내한 선교사들만 대한기독교서회에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 미국기독교서회와 영국기독교서회도 금전적인 지원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대한기독교서회 설립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탄생한 서회는 그 목적을 ‘조선어로 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의 잡지류를 간행해 전국에 보급하는 일’로 삼았다.
보급할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제작을 위해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의 문자사용 실태를 조사하고 사용할 문자에 대해 고심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로 한문을 사용했는데 반면 아녀자들은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사용했다. 당시 한글을 천시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지만 선교사들은 천대받던 ‘한글’을 서회 출판물의 문자로 지정했다.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성에 주목했다. 한글은 쉽게 익혀 읽고 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책을 사 읽는 계층이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근대화가 진행되면 지식인이 아닌 대중들이 책을 사 읽을 것이라는 복안을 가지고 한글을 서회의 문자로 사용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며 한글이 우리나라의 공식문자가 되며 선교사들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나라의 공식문자가 됐지만 한글에 대한 멸시는 여전했다. 그러나 한글의 보급과 사용은 필연적이었고 서회는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서회는 비록 기독교 출판사였지만, 종교 카테고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신앙서적 뿐만 아니라 일반교양, 상식, 위생, 수학, 사전류, 소설 등 다양한 출판물을 발간했다. 1940년 창립 50주년에 이르러는 700종 이상의 서적을 출판했으며 4,631만 부를 인쇄했고 그중 4,375만 부를 배포하는 쾌거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