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삶
마태복음 20:28
찬송: 212장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며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며 죽기까지 섬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란 마땅히 섬김의 삶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을 섬겨야 할까요? 첫째, 주를 섬겨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하였고(행 13:2),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 하였습니다(롬 14:18). 둘째,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간다고 하였습니다(롬 15:25). 베드로는 성도에게 주어진 각자의 은사대로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4:10). 교회의 직분을 주신 것도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엡 4:12). 셋째,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것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요 20:21). 성도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마 5:16). 성도는 어디서든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예수님의 모습으로 어디서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구별을 통해 질서를 세우는 하나님
출애굽기 24:1~2
찬송: 223장
430년간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홍해를 건너서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산 위에서 예배하는 사람과 산 아래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장로 70명은 시내산 위에서 예배합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도 잘난 사람 좋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별합니다. 질서를 세우시기 위한 구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무질서합니다. 노예살이에서 갓 벗어난 민족에게 무슨 체계적인 사회 질서가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24장은 무질서한 이스라엘 사회에 영적 질서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질서 속에서 하십니다. 질서가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 100명과 군인 100명은 다릅니다. 그 이유는 군인은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서가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사랑의 질서가 아름답게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따뜻한 질서가 유지되기를 소망하십니다.
•오늘의 기도
가정도 교회도 질서 위에 더욱 든든히 세워지게 하옵소서.
나도 모르게 하는 주님의 일
사무엘상 27:1~12
찬송: 312장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다윗은 블레셋 땅 아기스 왕에게로 망명했습니다(2절). 왕은 다윗에게 시글락 땅을 허락합니다(6절).
그런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 땅은 원래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인데 여호수아 당시에 정복하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4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윗이 그곳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시글락은 유다에 속하게 됩니다(6절). 하나님은 다윗의 망명을 통해 옛 선조들이 정복하지 못했던 땅을 끝내 취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 가지 더 본문에 소개됩니다. 시글락을 거점으로 다윗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입니다(8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오는 길에 아말렉 진멸의 명령을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런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미완의 사명들을 하나씩 해결해 가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다 알지는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붙들려 크게 쓰임 받고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에 붙들려 쓰임 받는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쉐마의 명령
신명기 6:4~9
찬송: 205장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는 본문의 ‘들으라’의 원어는 ‘경청하고 복종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쉐마’(Shema)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신앙 교육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쉐마의 명령은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절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선언한 후 우리의 전인격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기를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철저히 헌신하지 않는다면,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 분명코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그가 아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는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배도를 막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명령이행의 동기가 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쉐마 명령의 핵심은 말씀 진리에 있습니다. 이 명령은 말씀에 대한 열정, 집중, 그 강력함과 최선의 훈련과 순종을 말합니다. 가르치는 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이라야 자녀나 학생에게 진정한 교육이 됩니다. 마음에 새기는 일은 중심적 수용과 집중과 전인격적 각인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쉐마의 의도가 성취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진리의 근원, 사랑의 동기, 순종의 열정의 쉐마 명령의 핵심을 이루게 하소서.
원수에게 축복을 받으라
사무엘상 26:21~25
찬송: 446장
다윗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울만 없어지면 빨리 왕이 되고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터에서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에게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망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들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다윗은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굴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만 없으면 되는데 하는 마음보다는, 사울을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을 생각하여 사울의 생명을 귀히 여겼을 뿐 아니라 다윗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고, 그 결과 사울은 불쌍한 죽음을 맞이하고,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자, 원수,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축복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다름이 있다면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한 번쯤 우리의 신앙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이방인들과 다른 삶을 추구하게 하소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9
찬송: 309장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 정말 은혜롭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다는 것보다는 뭔가를 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귀찮다 하지 않으시고,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준비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달라고 떼를 쓸까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되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듯이 좋으신 아버지인 우리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시편 103편에 “우리의 약한 체질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모자란다 할지라도 저주하고, 채찍으로 때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며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조금이라도 그 사람의 삶을 아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부모가 되니까 나의 잘못된 어떤 모습들이 자녀의 삶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여 돌이키고 회개하게 되고 늘 자녀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채움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채우심이라 고백하며 사모할 때 좋은 것으로 우리 영혼에 채워주십니다. 이러한 증거를 가진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채움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